바깥사돈과의 희한한 동거
정말이지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난 여자입니다.
19살꽃다운 나이에 31살이나 되는 시쳇말로 띠 동갑 남편에게 보쌈을 당하듯이 시집을 온 지금 겨우 54살의 나이로 며느리도 보고 손자도 본 여자랍니다.
제 또래의 여자들 중에서 저보다 일찍 며느리를 보고 손자까지 본 경우는 무척 보기 힘들거든요.
34년 전 저는 집은 강원도 산골이지만 산을 개간하여 배추 농사를 짓는 부모님 밑에서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생활 자체는 아주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았답니다.
요즘이야 농기계가 좋아서 아무리 비탈이 진 산이라도 아주 넓고 광대하게 깎아서 먼저 옥수수를 심고 배어내고 그 자리에 다시 배추 농사를 짓고 있습디다.
하지만 당시에는 손바닥만한 밭에 농사를 지어야 하였기에 부모님과 우리 삼남매 입에 풀칠을 하기도 어려운 형편이었죠.
오죽하였으며 강원도 처자는 시집가기 전에 쌀 한 말만 먹고 간다며 부잣집에서 살다 시집을 간다고 했겠습니까.
강냉이 죽에 감자가 거의 주식이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명절이나 제삿날에도 제사상에 올릴 밥이나 쌀밥이고 그나마도 제사가 끝나면 그 밥은 온통 보리인 남은 가마솥으로 들어가 섞으면 흰쌀의 모습은 어쩌다가 한 톨 보일 정도였답니다.
학교요?
하나 있던 오빠는 못 배운 것이 한이 되었던지 고등학교까지 보냈지만 저와 제 동생의 경우에는 딸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겨우 중학교를 졸업을 한 것이 그나마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답니다.
우리 이웃에 살았던 금순이라는 제 또래의 애는 초등학교 당시로 치면 국민 학교 6학년이 마치기 무섭게 엄마아빠를 따라서 밭으로 나가야 하였거든요.
지금도 저와 두 살 터울의 제 여동생이 가방을 들고 중학교로 갈라치면 사립문 앞에서 우리의 허름한 교복이지만 교복을 입고 등교하는 모습을 바라보던 금순이의 부러워하는 모습을 생각하면 마음 한 편이 찡 하기도 하답니다.
하지만 저나 제 여동생도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금순이처럼 밭으로 나가야 하였습니다.
제 여동생의 경우 저보다 2년 후 졸업을 하였고 졸업을 한 후 몇 달은 엄마아빠 그리고 저를 따라 밭으로 갔지만 몇 달을 버티질 못 하고 큰아버지가 있던 역시 강원도는 강원도이지만 경기도와 가까운 도시로 나가 공장생활을 하였지만 유달리 우리 엄마아빠는 저에겐 그런 기회를 주지 않고 같이 데리고 농사일을 시켰습니다.
농사일이라면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던 저에게 농사일로부터 해방을 시켜준 사람이 있었으니 그 사람이 저를 요즘 시쳇말로 띠 동갑이었던 남자였고 농사일을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던 저를 보쌈을 하듯이 데리고 시집을 오게 한 바로 사람은 이미 고인이 된 남편이었답니다.
강원도에서도 아주 깊은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몇 발자국만 북으로 걸어가면 휴전선이 가로놓인 철책선이 놓인 그런 곳과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하기에 우리는 여자를 보는 것을 어려웠지만 남자는 거의 신물이 날 정도로 보고 자랐답니다.
한길에 나가면 보이는 것이 먼지를 뿜으며 지나가는 군인 트럭이었고 중학생이었던 아니 초등학교 여자아이들만 지나가도 그 군인 트럭에 탄 군인들은 휘파람을 불며 손을 흔드는 것만 보고 자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요즘 보면 초등학생들 중에 일부 여자애들은 3~4학년 밖에 되지도 아니하였는데도 가슴이 부풀기 시작을 합디다.
하지만 저의 경우 중학교 2학년 말부터 젖멍울이 지기 시작하며 모양을 갖추기 시작하였을 정도로 성장발육은 아주 느렸다고 보면 될 것입니다.
그런 제가 중학교 3학년이 되고는 등하교를 하면서 수도 없이 지나가는 군인 트럭에 탄 군인들로부터 받은 환호성을 모두 합친다면 아마 한일 월드컵 당시 광화문 거리를 흔들던 붉은 악마의 함성에 결코 지지를 아니 할 정도는 될 것입니다.
심지어 지프차에 계급이 높은 군인이 타지 않고 운전병만 탄 경우 포장도 되지 아니한 길을 먼지만 날리고 달려가다가는 멈추어서는 뒤로 후진을 하여서는 운전병은 집이 어디냐 펜팔을 하지 않겠느냐는 둥의 농담을 걸었지만 시골구석에 사는 탓에 부끄러움이 많았던 제가 얼굴을 붉히며 대꾸도 안 하고 묵묵히 제 갈 길을 걸어가며 계속 천천히 따라붙으며 집요하게 말을 걸었습니다.
그만큼 강원도 철책선 근처에 사는 여자애들의 인기는 높았습니다.
그 중에 저도 하나 포함이 되었죠.
“아가씨 0000부대가 이 근처로 아는데 어디지?”그날은 아마 우리 집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아니한 시골 장날이었을 것입니다.
5일에 한 번씩 문명을 접하는 날이기도 하였답니다.
“여기서 멀어요.”학교 친구 집의 위치는 잘 몰라도 인근에 있는 군부대의 위치는 거의 대부분 아는 것이 강원도 철책선 근처에 사는 사람들의 기본이랍니다.
“그래? 차를 타고 가야 하나?”머리는 군인처럼 짤게 깎아보였으나 군인 티는 나지 않는 그런 남자였습니다.
“예, 저기 골목을 돌면 차부가 있고 차부에서 차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00마을 앞이 나오거든요. 거기서 보면 간판이 보일 것이고 그 간판을 따라 올라가면 되요”전 그 남자가 동생이나 친구 면회를 가는 사람으로 봤고 그래서 전 아주 자세히 그 부대 위치를 가르쳐주었답니다.
“고마워요 그런데 아가씨 집은 어디지?”부대 위치를 알았으며 그만 가면 그만이련만 그 남자는 우리 집의 위치를 물었습니다.
“여기서 저기 방향으로 버스 타고 30분정도 가면 00마을 입구가 나오고 거기선 산길을 타고 20분만 걸으면 나와요”제가 미친 것이죠.
아니 뭔가에 홀렸고 눈에 콩깍지가 낀 모양이었던지 모를 일이었습니다.
“이름은?”읾까지 물었습니다.
“명순이 박 명순”친절하게 이름까지 알려주고 말았습니다.
“장에는 자주 나와?”또 물었습니다.
“예 장날이나 나오지 그렇지 않으면 나올 일이 없어요.”웃음까지 지어보이며 아주 친절하게 대답을 하였던 것 같아요.
“고마워요 아가씨 그럼 다음에 봐요”알듯 말듯 한 말만 남기고 군인 같으면서도 군인 같지 않던 그 남자는 저에게 손을 흔들며 사라졌고 저도 그 남자가 모습을 보이지 아니 할 때까지 손을 흔드는 미친 짓을 하였답니다.
“어~또 만났네!”군인 같으면서도 군인 같지 않던 그 남자를 다시 만난 곳은 바로 그 장터였고 또 그날 이후 첫 장날이었습니다.
“어머 그러게요”저도 모르게 반갑더라고요.
“어때 시간 있어? 커피나 한 잔 하지”웃으며 물었습니다.
요즘이야 커피를 마치 무슨 숭늉처럼 생각하고 마시지만 당시에 제가 살던 강원도 산골에서는 이름은 들어봤지만 먹어보지 못 한 것 중에 하나였습니다.
물론 장이나 면소재지에는 다방이란 곳이 있었고 그런 곳에는 팔았지만 입에 풀칠도 근근이 하는 형편에 언감생심 꿈도 못 꿀 그런 것이었습니다.
또 중학교에 다닐 때 어는 한 애가 커피 가루라고 하면서 가지고 왔기에 손가락 끝에 찍어서 향기도 맡아 보고 맛을 본 적은 있었지만 정박 커피를 정식으로 먹은 적은 없었습니다.
“몰라요”차마 그 남자에게 먹어 보지 못 하였다고 말을 하기는 뭐 하더라고요.
“차부 앞에 다방 있던데 같이 가지”그 남자는 저에게 그렇게 말을 던지고는 뒤도 안 돌아보고 앞장을 서서 차부 족으로 가는 골목을 향하여 갔습니다.
그러나 전 마치 자석에 끌려가는 쇠붙이처럼 그 남자 뒤를 졸졸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명순이라고 했지?”다방에 들어서더니 자리를 잡고 앉았고 맞은편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자 물었습니다.
“예 박 명순 맞아요.”지금 생각하여도 아주 촌스러운 이름이었지만 전 아무런 느낌도 없이 대답을 하였습니다.
“몇 살?”나이를 물었습니다.
“18살”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그래? 30살이면 나이가 많지?”웃으며 물었습니다.
“아뇨?”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전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문관 어때?”다시 물었습니다.
혹시 모르니 문관이 무엇인지 말을 하겠습니다.
문관은 군인이지만 군적을 가지지 아니한 사람을 말합니다.
이는 직업군인 하고는 또 다릅니다.
직업군인 즉 하사관과 장교들 경우 월급을 받는 말 그대로 직업군인이면서 군적을 가진 사람은 직업군인이라고 하는 반면 문관은 직업군인처럼 월급을 받으며 군대에서 일을 하지만 군적이 없다는 것이 다른 것입니다.
요즘이야 군인 스스로가 차량정비나 기타 잡다한 일까지 스스로 한다고 하지만 당시에 그런 전문적인 부분은 그 사람들 즉 문관이 맡아서 하였습니다.
또 직업군인의 경우 군적이 있기에 국가에서 어디서 근무를 하라는 지시만 있으면 전방이든 후방이든 가리지 않고 가야 하였지만 문관의 경우 한 번 발령을 받으면 그 부대에서 근무하며 출퇴근을 하였습니다.
그랬기에 강원도 산골의 철책선 근처에 사는 아가씨들의 경우 남편을 따라 2~3년마다 뜬구름 떠돌듯이 떠돌아야 하는 직업군인보다는 문관은 남편 후보로 우선으로 쳤습니다.
“문관 이예요?”놀라며 그 남자 얼굴을 다시 봤습니다.
“응 싫어?”웃음을 잃지 않는 그런 남자로 보였습니다.
“아니요”하고 대답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아주 늠름하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완전이 제 눈에 콩깍지가 낀 것입니다.
“그래 우리 그럼 사귀자”손을 내밀며 악수를 하자는 것 같은 자세를 취하며 말하였습니다.
“몰라요”그렇게 말하면서도 전 저도 모르게 그 남자가 내민 손을 잡고 악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장날마다의 데이트는 시작이 되었습니다.
문관이었기에 그는 항상 12시 정도면 장터에 모습을 보였습니다.
점심시간에 외출을 한 데이트였습니다.
그리고 어떤 때는 차를 몰고 일찍 나와서 우리 집으로 가는 산 입구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다가 저를 데리고 장터로 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런 경우는 차량정비공이었던 그 남자가 차량정비를 하고는 주행 테스트를 한다는 명목으로 차를 몰로 나온 경우였습니다.
“어머 오빠 일찍 왔네, 많이 기다렸어?”그날도 그 남자는 일찍 나와서 산 입구에 차를 대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니 방금 왔어 타”하고 말하였습니다.
“응”하고 차에 올라탔습니다.
“!”그러자 그 남자가 전에 하지 않았던 짓을 하지 뭡니까.
손을 꼭 잡았고 반항을 하지 않고 수줍은 마음에 고개를 숙이자 손을 당기더니 정 끌어안았고 역시 부끄러움에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자 그이는 제 입술에 입술을 포개지 뭡니까.
“오빠 여긴 우리 집 입구고 마을 입구야 누가 보면 어쩌려고”짧은 키스지만 키스를 하다말고 그이 가슴을 밀치며 말하였습니다.
“참 그렇지”그이가 웃으며 말하고는
“자~그럼 갑니다.”하고는 차를 몰기 시작하였습니다.
“오빠 지났잖아?”놀라며 말하자
“아가씨는 조용히 가시기만 하면 됩니다.”하며 장터를 지나 계속 달렸습니다.
“오빠가 자취하는 자취방이야”거의 외딴집 수준의 집 앞에 차를 대고는 말하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전 그이의 의도를 몰랐지만 조금 전의 키스를 생각하고 키스 정도를 하겠지 하는 생각을 하며 울굴을 붉혔습니다.
“주인집 아저씨 아줌마 장에 모셔다 주고 지금은 아무도 없거든”그이가 먼저 내리더니 제가 앉은 곳은 문을 열고 팔을 당기며 말하였습니다.
허름한 집이었지만 그이의 방안은 총각이 혼자 산다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깔끔하게 청소도 되었고 정리정돈도 잘 된 상태였고 난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고 그이의 자취방 안으로 들어갔고 그이는 난 끌어안고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서 하다가 만 키스를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집으로 올라가는 산 입구에서 하다가 만 키스는 행여 지나가는 마을 사람이나 아님 역시 지나가는 군인 트럭에 탄 군인들이 볼까봐 두려운 마음이 앞섰지만 누구에게도 발각이 되지 않을 그이의 자취방 안에서는 키스는 달콤함 그 자체였습니다.
저도 모르게 그이 목에 매달려 들어오는 그이 입술을 빨다가는 지치면 제 혀을 그이 입안으로 보내면 그이는 제 혀를 빨아주고 그이가 제 혀를 빨다기 치친 나머지 자신의 혀를 제 입안으로 보내면 저오 그이 혀를 빨았습니다.
“!”그런데 긴 키스 끝에 뭔가 딱딱한 그 무언가가 제 하체를 압박한다는 것을 알았고 안 순간 그이의 손이 허름한 블라우스 안으로 들어와서는 거의 헤어지기 직전의 브래지어 안까지 침입을 하더니 젖가슴을 주무르기 시작하였습니다.
하지만 키스도 처음이고 젖가슴을 남자 손에 의하여 주물림을 당하는 것도 처음인지라 그저 부끄럽다는 생각에 눈도 뜨지 못하고 젖 어쩔 방법이 없이 무방비 상태로 아무 반항 없이 그이에게 맡기고 있었습니다.
“안 돼!”그이의 손이 제 부끄러운 부분에 손이 닿자 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이를 밀쳤습니다.
“명순아 우리 결혼하자”그이가 다시 저를 보듬으며 말하였습니다.
“............”그이의 그 말 즉 결혼이란 단어는 다시 저로 하여금 무장해제를 시키기에 아주 충분한 말이었습니다.
앞에서도 잠시 언급을 하였지만 겨우 초등학교 밖에 다니지 못 한 금순이 아빠엄마도 문관이 나타나 금순이를 달라고 한다면 집안은 물론이고 얼굴도 보지 않고 딸인 금순이를 주겠다고 하였을 정도로 사위 후보 일 순위가 문관이란 것을 잘 아는 마당에 요즘 시쳇말로 프러포즈나 다름없는 말인 결혼 이야기가 나오는데 어찌 무장해제를 당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랑해”그 한 마디에 일체의 반항이 사라지자 그이의 팔에는 힘이 더 들어갔고 그리고 다시 은밀한 부분을 손바닥으로 쓰다듬기 시작하였습니다.
“아~흑 몰라 나도”그이의 사랑한다는 말을 무장해제를 당한 저에게 무장해제를 당한 그 이상으로 만들었고 그리고 그이의 손이 바지 안 아니 정확하게 말하여 팬티 안으로 들어오자 잡는다고 잡은 그이의 팔목을 잡은 손에는 힘이라고는 하나도 없이 그저 형식적으로 잡은 것처럼 제 스스로가 느껴질 정도였고 순식간에 전 알몸이 되어 그이의 깔아둔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겨야 하였고 이어서 그이도 알몸이 되어서는 이불 속으로 들어오더니 들어오자마자 제 몸 위에 몸을 포개었습니다.
“악! 아파 빼!”오빠의 알몸이 제 살에 닿았다는 느낌을 가지기도 전에 제 은밀한 곳을 무자비하게 찌르는 것이 있었고 그게 그이의 좆이란 것은 바로 알 수가 있었습니다.
순식간에 전 그이의 여자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솔직하게 말하여 요즘이야 남들이 나이를 먹어 한물 간 여자라고 치부해 버리지만 남자의 맛을 알고 또 즐길 줄도 알지만 당시에는 성에 대한 지식이라고는 전혀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 아무런 느낌 아니 그저 막연하게 아프다는 느낌과 그이의 여자가 되었다는 생각이 전부였습니다.
하지만 그이는 저의 아픔에는 아랑곳하질 않고 분탕질을 치더니 제 은밀한 곳 안 깊숙이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는 흡족하다는 듯이 웃었고 그리고 어기적거리는 걸음걸이로 버스에 올라타자 뒤도 안 돌아보고는 차를 몰고 보대로 향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 해 봄까지 전 부모님 몰래 수시로 그이와 만났고 매번 만나기만 하면 그이는 자신의 흔적을 제 몸에 남겼습니다.
“으~액!”문제는 터지고 말았습니다.
저에게 입덧을 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엄마의 추궁이 시작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음식 먹을 것이 체한 것이라고 둘러대었습니다.
하지만 계속 되는 구토에 엄마는 다시 추궁을 하며 외출을 금지 시켰습니다.
오매불망 그이가 보고 싶은 것도 모르고 말입니다.
“아버님 어머님 명순이 저 주십시오.”몇 번을 장터에 안 나타나자 그이가 정종 한 병과 고기 몇 근을 들고 집으로 왔고 엄마아빠 앞에서 큰절을 올리더니 막무가내로 저를 자기에게 달라고 하였습니다.
아빠는 좋아하는 것 같은 얼굴을 하였지만 엄마는 나이 어린 제가 무려 12살이나 많은 남자에게 시집을 가는 것이 못 마땅한 것 같은 표정이었지만 이미 제 몸의 상태를 알았기에 반대를 하지 못 하였고 우리의 결혼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였고 그이가 우리 집으로 와 저를 자기에게 달라고 한 지 두 달 만에 우리는 결혼식을 하였고 그리고 결혼을 하여 남들에 비하여 조금은 빠르게 손자를 안게 해준 외동아들을 낳았던 것입니다.
결혼을 한 그이와 전 장터 근처에 집을 얻어서 아이를 키우며 오순도순 살았습니다.
그리고 그이는 55살이 되던 해에 문관에서 정년퇴직을 하고는 차린 것이 배운 것이라고는 하나뿐이며 그 기술을 천직으로 알았던 자동차정비 일을 조가만 가게를 얻어서 시작을 하였습니다.
자동차 아니 자가용이 급격히 늘어나던 시절인지라 그이의 간이 자동차 정비소는 정말이지 성업을 하였습니다.
군대에서의 꼼꼼함은 자가용을 가진 사람들에게 믿음을 준 것입니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나 할까요.
정년퇴직을 하여 간이 정비소를 차리고 2년 만에 자기가 수리한 차를 시험테스트 한다며 차를 몰고 나가더니 그이는 싸늘한 시체가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그이를 앗아간 산길이 싫었습니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는 외아들하고 단 둘이 도시로 나왔습니다.
45살의 어중간한 나이를 먹은 저로서는 마땅한 일거리가 없었습니다.
그때까지 한 것이라고는 농사짓는 일과 부엌에서 밥이나 짓고 반찬이나 만드는 일이 전부였으니 말입니다.
그래서 착안을 한 것이 반찬가게였습니다.
처음 반찬가게를 시작하였을 때는 화학조미료에게 익숙해져버린 도회지 사람들 입맛에는 맞지 않았던지 만은 양을 쓰레기통에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가 착안 한 것이 팔다 남은 반찬들을 인근의 형편이 어려운 노인들만 사는 집이나 소년소녀 가장이 사는 집에다가 주었습니다.
여러분 이거 아시나요?
화학조미료의 위력을(?) 말입니다.
여러분들도 무심결에 큰 메이커라는 것만으로 어떤 성분이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고 그 맛에 익숙하여져 습관적으로 찾은 라면을 한 번 봅시다.
우리나라의 라면 메이커 많죠?
후발 주자로 시작하였다가 줄 곳 2등으로만 달리다가는 친일 악덕 언론과 결탁을 하여 우지 파동을 일으켜 선두를 달리던 삼양을 곤경에 빠트리고 일약 일 위로 올라선 농심 말입니다.
나중에 우지가 팜유에 비하여 결코 나쁘지 않은 좋은 기름이란 것이 밝혀졌지만 이미 대세는 악덕기업인 농심에게 넘어 갔고 그렇게 밝혀진 것을 모르는 대다수 국민들은 삼양에 등을 돌리고 농심 사렴을 먹기 시작하였죠.
그런데 거기에 중요한 비밀이 있습니다.
농심라면에는 글루타민소다라고 하는 화학조미료가 범벅이 된 것입니다.
글루타민소다는 아미노산의 한 종류로 맛 성분중의 하나입니다.
고기에 많은 이노신산과 더불어 다시마, 토마토 특히 간장이나 된장 등의 장 문화권이라고 할 수 있는 동양에서 가장 선호하는 맛 성분으로 흔히 감칠맛이라고 합니다.
간장 같은 것에도 풍부하게 있습니다.
이노신산과 결합하면 더 맛이 나죠.
그래서 조미료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 자체는 맛이 없으나 다른 맛을 끌어내는 역할을 합니다.
문제는 다시마나 장 등에서 뽑은 천연적인 것이 아니라 화학적 방법으로 만든 것이 문제랍니다.
저도 이야기로 들은 것이지만 미국의 유명한 의학 신문이기도 한 뉴사이언티스트 2009년 10월26일 인터넷 판에서는 이 화학조미료 즉 MSG를 과다 섭취를 산 사람의 실명한 눈에서 많은 MSG가 검출이 되었다는 기사가 나기도 하였답니다.
허나 우리 같은 영어도 모르고 저처럼 학력이 중학교가 전부인 사람들이 그렇게 어려운 것까지 알기에는 뭐 하지만 간단하게 아는 방법이 하나 있답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외식문화가 많이 성행하고 있죠?
그런데 어떤 식당에서 밥을 비롯한 음식을 먹고 나면 이상하리만치 갈증이 나며 목이 마른 경우가 없나요?
또 라면을 끓여먹으면 분명하게 라면과 함게 많은 국물을 섭취를 하였건만 갈증이 심하게 난 경우는 아주 허다하죠?
바로 그것입니다.
MSG 즉 화학조미료가 많이 든 음식물들을 먹은 후면 갈증이 나며 물을 당기게 합니다.
반면 천연조미료 즉 멸치나 다시마 등등을 이용하여 맛을 낸 음식들을 먹을 경우 그 음식이 조금 짜다 싶어도 그다지 물을 당기지 않습니다.
라면도 마찬가지입니다.
삼양이나 진 혹은 팔도 등의 라면 메이커에서 생산되는 겉봉투에 MSG 무 첨가라는 제품의 라면을 먹을 경우 역시 물을 적게 부어 끓여도 물이 먹고 싶은 생각이 거의 없지만 농심의 MSG 무 첨가라는 표시가 없는 대부분의 화학조미료인 글루타민소다가 첨가가 된 라면에 물을 많이 붙고 끓여서 싱겁게 하여도 먹고 나면 으레 물을 먹게 만드는 것으로도 글루타민소다가 엄마나 백해무익한 것임을 알 것입니다.
하여간 전 절대 화학조미료인 미풍이나 미원을 사용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 맛은 나이 든 사람들 특히 시골에서 오래 산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김치 종류 몇 가지로부터 시작한 반찬가게는 점점 가지 수도 늘려갔고 한두 번 먹어본 젊은이들의 입맛에도 맞아 들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반찬은 만들기 바쁘게 팔려나갔습니다.
지금은 너무 손님이 많아 예전처럼 저 혼자 하는 것이 아니고 몇 명의 아줌마들을 고용하여 반찬을 만들기에 벌이도 쏠쏠하지요.
그 덕에 우리 외아들은 외국유학도 다녀 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3년 전 아들을 결혼을 하겠다면 며느리가 될 여자라고 여자를 집으로 데리고 왔습니다.
솔직히 보잘 것 없는 저의 집안이지만 그래도 명색이 외국유학까지 다녀왔고 직장도 번듯한 곳이었기에 따져봤습니다.
며느리 될 아이의 집안은 우리 집안에 비하면 양반 중에서도 양반이었습니다.
오빠와 언니들은 모조리 결혼하여 미국에서 영주권을 얻어서 살고 있는 변호사며 의사 그리고 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며느리가 될 아이 혼자서 67살 되신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것이 흠이라면 흠이었습니다.
그 애 오빠와 언니들이 아버지를 미국으로 모시고 가려고 수도 없이 노력을 하였지만 그 양반은 미국에 가서는 보름도 지내지 못 하고는 귀국을 하였고 며느리가 될 아이 역시 오빠 언니들이 미국으로 들어오라고 종용을 하였지만 미국에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다는 아버지를 홀로 두고 갈 수가 없었기에 우리나라에 살았고 그리고 저의 외아들하고 눈이 맞아버린 것입니다.
딱히 반대를 할 이유가 없었기에 결혼을 시켰습니다.
결혼을 하고도 며느리는 이틀이 멀다하고 가까운 곳에 살던 바깥사돈이 혼자 사는 집으로 갔습니다.
며느리는 자기 친정아버지 집에 가려면 자게 운영하는 반찬가게를 지나가야 하기에 제가 운영하는 반찬가게에서 파는 밑반찬을 갖가지 가지고 말입니다.
저의 며느리가 된 딸이 이틀이 멀다하고 간 이유는 간단하였습니다.
딸을 우리 집으로 시집보내기 2년 전에 혼자가 된 바깥사돈은 밥을 짓기는커녕 설거지도 못 하는 소위 남자가 부엌에 들어가면 불알이 떨어지는 것으로 아는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이틀이 멀다하고 친정아버지 집으로 가서는 밀린 설거지를 하여야 하였고 이틀 정도는 먹을 밥을 지어놓고 와야 하였던 것입니다.
그런 며느리의 행동이 한편으로는 괘씸하였지만 또 한편으론 그런 바깥사돈의 형편에 동정심도 갔습니다.
제가 장만을 한 집이지만 크지 않은 아파트는 방이 고작 세 칸으로서 아들이 장가를 들자 안방을 아들 내외에게 주고 작은 방을 제가 사용하였고 하나 남은 아주 작은 방에는 우리 손자의 장난감이며 미끄럼틀과 그네가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방이 만흥 집 같았더라면 전 아마 며느리에게 우리 집으로 바깥사돈을 들어오시게 하여 며느리의 번거로움을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집이 비좁은 관계로 그리 할 수가 없었습니다.
문제는 작년 여름 아들의 여름휴가 기간에 생기고 말았습니다.
다른 사돈지간에 비하여 저는 바깥사돈하고 자주 얼굴을 뵈었습니다.
며느리의 친정아버지가 놀라 다니는 공원에 가려면 항상 제가 운영하는 반찬가게 앞을 지나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참 우리 아들과 결혼을 하기 전에 바깥사돈의 집은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고는 그 먼 길을 오고 가야 하는 딸을 생각하니 안 되게 느껴졌던지 살던 집을 처분하고 조금은 외진 우리 동네로 이사 온 것입니다.
여름휴가를 아들내외는 아이를 데리고 동남아로 간다지 뭡니까.
저에게 한 마디 상의도 하지 않고 아들은 비행기 표며 호텔까지 예약을 해 둔 상태라 만류를 할 수도 없었습니다.
또 저야 반찬가게를 하기에 집을 비울 수가 없다고 하겠지만 날이면 날마다 공원에서 세월을 보내는 자기들의 장인어름이고 친정아버지인데 모시고 가면 오죽 좋겠어요.
아들이나 딸이나 시집장가 들면 남보다 못 합디다.
어떻게 키운 아들입니까.
홀몸으로 반찬가게를 꾸려가면서 대학도 보냈고 유학도 보낸 저 아닙니까?
바깥사돈 역시 고생고생을 해 가면 저의 며느리가 된 아이를 포함하여 4남매를 힘들게 키웠으나 말이 좋아 미국으로 우시면 모시겠다고 침 발린 말만 하고 친정아버지와 가까이 사는 우리 며느리 역시 시어미야 반찬가게를 비울 수가 없기에 그렇다고 치더라도 하루 종일 공원에서 소일을 하는 친정아버지 정도는 모시고 함께 여름휴가를 가면 우죽 남 보기에도 좋겠습니까.
그런데 이것들은 가기 일주일 전에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일방적으로 알리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저에게 일까지 떠맡기고 간다는 것입니다.
자기 친정아버지 집인 바깥사돈 집으로 이틀에 한 번꼴로 밑반찬을 챙겨서 들여다보고는 밀린 설거지며 이틀 드실 밥을 지어달라는 일을 말입니다.
어이가 없더군요.
아니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현이 더 멋있어 보이겠죠.
하지만 매일 아침이면 공원으로 놀러 가시는 바깥사돈하고 눈인사를 하는 마당에 딱히 거절을 할 명분이 없더군요.
일주일 후 아들내외는 손자만 데리고 여름휴가를 떠났습니다.
첫날은 전날 며느리가 바깥사돈 댁에 다녀 온 것을 알기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식사는 하셨어요?”오전 바깥사돈이 공원으로 가면서 목례를 하기에 예의상 물었습니다.
“예 안사돈”바깥사돈께서 환하게 웃으며 대답을 하였습니다.
“내일 아침 식사까지는 되죠?”다시 물었습니다.
“그게......그게.....”바깥사돈께서 말을 더듬었습니다.
“왜요 사돈어른”가게 안에서 묻고 답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란 생각에 가게 밖으로 나가며 물었습니다.
“간밤에 친구가 와서 밥도 먹고 술을 마셔서............”바깥사돈이 말을 흐렸습니다.
“그래요 그럼 말씀을 하시지 저녁은 되죠?”웃으며 물었습니다.
“예 저녁은 될 겁니다.”웃으며 대답을 하였습니다.
“그럼 놀다 오세요, 저녁에 가게 닫고 들려서 해 드릴게요.”하고 말하자
“이거 미안해서 하여간 저녁에 뵙겠습니다.”하고는 공원을 향하여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공원으로 향하는 바깥사돈의 어깨는 무척 무거워 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