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이 늦은 밤에 무슨 바람이 불었을까? 설마 내가 보고 싶 어서 온 건 아닐 테고" 기섭이 말했다. 언제나처럼 미소짓고 있었다. "...약이 떨어졌어요." 목이 꽉 잠겨 한마디 떼는 것도 힘들었다. "벌써? 이런.... 양을 지키지 않으면 위험해." "...예" 그는 침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종이봉투를 들고 돌아왔 다. "안색이 안 좋구나. 왜, 무슨 일 있는 거냐?" 그가 내 등을 쓰다듬으며 물었다. 다정한 목소리였다. 뭐 라고 설명할 수는 없지만 지독히도 슬픈 인상 같은 것이 언 뜻 가슴 속을 훑고 지나갔다. 문을 박차고 뛰쳐나왔다. 터지 는 흐느낌을 참을 수 없어서였다. 기섭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최동훈 앞에서 울 수는 없었다. 동네 앞 놀이터 화장실로 들어갔다. 문을 걸어 잠그고 기 섭이 준 종이봉지를 꺼내 남김없이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별채의 문을 밀었다. 문은 싱거우리만치 쉽게 열렸다. 형 이 그림처럼 고요히 누워 있었다. 얼굴이 예전 그대로였다. 불에 덴 흔적조차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눈을 뜨 지 않았다. 한 손으로 활과 화살통을 몰아쥐고 형을 들쳐멨다. 거리 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끔씩 신문지가 바람에 날려 굴러와 서 다리를 휘감고 텅 빈 버스가 덜컹거리며 지나갔다. 복숭아 나무 밑에서 불도저는 여전히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시체들을 밟으며 다가갔다. 내 옷을 입고 있는 시체의 다리가 보였다. "저 왔어요. 형도요." 시체는 대답이 없었다. 다시 들여다보니 반쯤 뜯어먹힌 얼굴은 분명 그 미친 여자의 것이었다. 기차가 지나갔다. 복숭아 나무는 온데간데 없고 대신 그 자리에는 어린 시절의 빈 집이 서 있었다. 형과 미친 여자 를 나란히 방 안에 뉘였다. 나는 언제나 그 누구도 지켜주 지 못했다. 화살을 한 대 시위에 걸었다. 빈 집은 관으로 변해 있었 다. 그 안에는 아버지가 누워 있었다. 관뚜껑이 닫혔다. 시 위가 팽팽하게 당겨졌다. 화살촉에서 도깨비불 같은 파르스 름한 불똥이 튀어올랐다. 짧은 긴장이 끊어지면서 시위를 떠난 화살은 거대하게 타오르는 불덩어리가 되어 관에 깊숙 히 꽂혀 들어갔다. 처절한 비명과 몸부림이 불길 속에서 터 져 나왔다. 벌컥 세상이 핏빛으로 변했다. 하늘에서 폭풍우 처럼 핏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하늘은 말끔히 개어 있었다. 나는 쑤시는 이마를 문지르 며 일어섰다. 관은 다시 빈 집이 되어 서 있었다. 방문을 열 었다. 형과 내가 누워 있었다. 대지는 숨이 끊어진 우리에게 서 흘러나온 피로 천천히 물들어갔다. 나는 웃으며 무너져 내렸다. 나는 우리 안에 있는 아버지를 죽이는 것 이상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 흐려지는 시선에 즐비하게 누워 있는 시체들이 보였다. 모두 낯익은 얼굴들이었다. 내 어린 시절의 친구들과 한기 욱, 반(反) 나찌스 대표들, 그리고... 동훈도 있었다. 나는 불도저 위에 누워 있었다. ...복숭아 나무.... 하늘에 대지의 핏빛이 비쳐져 있었다. 복숭아 나무는 형이었다. 엄마가 죽고 아버지를 따라 서울에 와서 형과 나는 생전 처음 외국 서커스를 구경했다. 불타는 링을 통과해 넘는 호 랑이를 보고 온 그날 밤 꿈 속에서 나는 하얀 호랑이가 되 었다. 미녀가 차갑게 웃으며 유리조각이 촘촘히 발려진 채 찍을 휘둘렀다. 링은 너무 좁았다. 하얀 호랑이는 떨면서 뒷 걸음질쳤다. 사람들은 무서운 얼굴을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하얀 호랑이를 붙들어 불타는 링 사이에 처넣었다. 꽉 죄는 불길은 머리에서 발 끝까지를 샅샅이 핥고 지나갔다. 눈알 이 타고 입 속에서 불이 솟구쳤다. 하얀 불덩이는 미쳐 날 뛰다가 하늘을 찢고 날아 올랐다. 저 멀리 아득하게 눈 덮인 겨울산장이 보인다. 나를 부르 고 있다. 그 곳은 알 수 없는 그 어느 때부터 내가 있었던 자리이고, 또한 시작이자 끝인 곳이다. 나는 다시 나의 자리 로 되돌아 간다. "디아세틸모르핀 복용과다입니다. 치사량의 두 배에 가깝 습니다. 즉사로군요." 부검이 끝난 서지호의 시체는 화장되어 5년 전인 80년 12 월 서인호가 뿌려졌던 바다 위로 흘러갔다. <꽃의 전쟁> -01- 작고 하얀 새가 내 눈앞을 춤추며 날아간다. 어느새 새의 긴 꼬리가 불꽃으로 변해 있다. 하얀 새는 찬연하게 빛나는 불새가 되어 태양처럼 짙은 화염을 이글거리며 하늘 높이 솟 구쳐 올라간다. 검은 옷의 사내가 나타난다. 머리카락이 바닥에 길게 끌리 고 있다. 사내는 가슴에서 얼음칼을 뽑아 불새를 향해 던진다. 캬아아악― 하늘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이 터져나온다. 불새는 돌멩이처럼 땅으로 추락한다. 그러나 바위에 부딪쳐 산산조각 이 난 것은 불새가 아니라 하얀 모형 비행기이다. 검은 옷의 사내가 불에 달구어진 얼음칼로 내 몸을 수천 수 만 번이나 난자한다. 나는 갈가리 찢긴 피투성이의 나를 내려 다본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칼의 검은 손잡이가 눈 위로 솟아있는 아버지이다.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돌을 맞으며 죽어간다. 그 옆에서 검은 옷의 사내가 얼음칼을 쥐고 기다리고 있다. 사냥 꾼들이 작고 하얀 새를 몰아간다. 새는 떨리는 부리로 궁수에 게 사냥꾼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궁수의 화살에 맞은 것은.... 제발, 누가 얘기해줘. 이건 꿈이라고, 다 끝나버린 일이라고, 오늘밤은 무사히 잠들 수 있을 거라고.... ...작고 하얀 새가 내 눈앞을 춤추며 날아간다.... 제 1장 <메탈 베이스> 한준은 털썩 소파에 몸을 던졌다. 배는 쓰리도록 고프고, 아 침에 정신없이 들쑤셔놓고 나간 거실은 한심할 만큼 너저분했 지만 손가락 하나도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옛날이야기의 '우 렁각시'라는 캐릭터가 어떻게 창조되었는지 실감하는 순간이 었다. 시계는 새벽 두 시 십 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삼십 분 전, 가까스로 계열사 주간지의 마감시간에 맞춰 하가 호텔의 개관 축하 리셉션 기사를 넘겼다. 지상 50층, 지하 6층, 연건평 11 만 186평의 하가 호텔은 하가 그룹의 재력을 상징하기에 충분 했다. 오후 여섯 시부터 시작한 그 초호화판 파티는 자정이 돼서야 끝났다. 정계?재계?법조계의 실세, 고급 관료, 군 장 성, 주요 기관장 등 대한민국에서 내로라 하는 거물들이 총집 합했다. 하가 그룹 강 회장의 화려한 가계도家系圖가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였다. 달로 칠 때 주간지의 네 번째 마감은 한준이 있는 월간보다 닷새 늦다. 그러니 마감 뒤에도 주간부의 일이 기다리고 있다. 지난달에 창간하여 아직 인원이 달리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 지만, 하가 호텔에 굳이 자신을 보낸 최 부장의 처사는 아무 리 생각해도 지나쳤다. 한준은 기분이 울적해서 주간부 사진 담당 임 기자가 좀 과하지 않느냐고 할 정도로 마셨다. 리셉션 홀의 분위기를 메모하고 있을 때 누가 샴페인 잔을 건네주기에 무심코 받으며 보니 강영후였다. 임 기자가 셔터 를 누르다 말고 그와 한준을 번갈아 보았다. 한준은 그 잔을 서빙하던 웨이터의 쟁반 위에 올려놓았다. "경찰서에서는 지낼 만했습니까? 들어보니 거기서도 VIP였 다구요. 아마 교도소 생활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당신, 말이 지나치군. 입조심 좀 하는 게 어때?" 강영후의 뒤에 서 있던 건장한 사내가 나직하게 으르렁거렸 다. 한준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무슨 소리. 내가 얼마나 조심하고 있는지 모르나본데 어디 한 번 내가 아는 것 다 말해볼까? 이봐, 강영후 씨. 그 기사, 취재한 것의 반도 못 쓴 거야, 알아? 당신 아버지 아니었으면 그 정도로 유야무야 넘어가는 건 턱도 없었어. 부모 잘 만나 서 무슨 짓을 해도 괜찮고, 당신 정말 좋겠어." 주위 사람들이 모두 그들을 주시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강영후는 말없이 미소지었다. 한준은 그때 처음으로 강영후의 눈을 보았다. 지적이고 시니컬한 얼굴에 너무도 어 울리지 않는 짐승 같은 두 눈동자가 짙게 그늘져 빛나고 있었 다. 한준은 보석처럼 아름다운 사내의 전신에서 순간 역한 피 냄새를 맡았다. 그 뒤틀린 이질감이 한준을 퍼뜩 취기에서 깨 어나게 했다. 강영후는 미소를 띤 채 한준의 옆을 지나갔다. "젠장, 확실히 난 집 자식은 다르네. 한 대 갈기진 않더라도 말 한 마디는 할 줄 알았는데." 임 기자는 못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하가의 황태자, 자신의 가십을 쓴 기자와 일대 난투극>같은 쓸만한 헤드라인 이 눈 앞에 어른거렸던 모양이었다. 한준은 소파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취해 있었다 해도 실수 한 것은 사실이었다. 찜찜한 기분을 달래려 몇 차례 심호흡을 했다. 자동 응답기의 외출 램프에 불이 깜박거리는 것을 보고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나다. 좋은 자리가 나왔구나. 스물 여섯 먹은 아가씬데 E대 졸업하고 올해 입사한 걸 비서실에 넣어두고 지켜보는 중이 다. 무엇보다 가정교육을 잘 받아서 아주 참하거든. 너만 괜찮 다면 내일이라도 만나게 해주마. 전화해라. ...그리고 얘, 아무 리 바빠도 밥은 꼭 챙겨 먹어야 한다. 저번에 보니까 얼굴이 많이 상했어. 임 차장댁한테 부탁해놨으니 네가 집에 일찍 오 는 날은 반찬거리 좀 갖다줄 거야. 원, 당최 마음이 안 놓여 서... 꼭 나가 살아야겠으면 파출부라도 쓰라니까 웬 고집이냐. 서른 한 살이나 먹은 놈이 혼자 밥하고 빨래하고, 왜 그리 청 승을 떨어. 어서 짝을 맞춰줘야 내가 편하겠다, 이놈아." 한준의 고모인 서 사장은 맨주먹으로 시작해서 사십여 년에 걸쳐 탄탄한 중소기업인 양화 유지를 일구어낸 사람이지만 남 녀의 역할에 대한 사고방식은 아직도 조선시대를 벗어나지 못 했다. 그 마음에 들 정도의 가정교육을 받은 여자라니 상상하 기조차 부담스러웠다. 한준은 어쨌든 마감도 끝났고, 한 번 뵈 러 가긴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넥타이를 풀었다. "너 아주 바쁘다? 일주일째 한 시가 넘도록 집에 안 들어오 고." 첫마디부터 투덜거리는 목소리의 임자는 홍재였다. 한준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아무리 나쁜 기분도 홍재 앞 에서는 사라져버렸다. "일이 아무리 고달파도 삐삐 열 번 치면 한 번쯤 연락해줄 수 있는 거 아냐? 아아, 애정이 완전히 얼음장이 됐구나... 그 러지 마라. 나 이 땅 뜨는 거 이제 얼마 안 남았어. 여러 말 안한다. 모레 오후 아홉 시까지 카바티나로 와. 민호랑 규섭이 하고는 약속잡았다. 그렇게 다 모이기가 어디 쉽냐? 안 오면 혼날 줄 알아. 민호 귀국한 것도 축하해줘야잖아?" 한준은 리셉션 홀에서 눈으로만 인사를 나누고 헤어진 백민 호를 떠올렸다. 며칠 전에 귀국했다는 소식은 들었으나 그 자 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마음 같아서는 붙들고 밤새워 얘기하고 싶었지만 시간에 쫓겨 그럴 수가 없었다. 셔츠가 날아가 소파 등받이에 걸쳐졌다. 안 그래도 난장판 이던 거실에 옷가지까지 가세하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이어 졌다. "힘든 하루였지, 쇼치필리?" 뜻하지 않게 흘러나오는 낯설은 목소리에 옷을 벗어던지던 손을 멈췄다. "넌 기가 막히게 아름답더군. 내가 생각해오던 모습 그대로 였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서... 후후후... 마지막으로 울어 본 게 언제였지?" 모음을 길게 끄는 듯한 어조의, 약간 금속음이 섞여있는 베 이스였다. 인간의 성대에서 나오는 소리라고는 도저히 믿어지 지 않을 정도로 감미로운 음색이었다. 한준은 벗다 만 바지에 걸려 넘어질 뻔하면서 응답기 옆으로 다가갔다. "넌 행복해 보이더군. 그래선 안되지. 네가 나 없이 행복하 다니, 절대로 허락 못해. 지금 이 순간부터 네 숨소리 하나 머 리카락 한 올까지도 모두 내 것이다. 영원히 말이야.... 반항할 생각은 버려, 쇼치필리. 난 어떤 싸움에서도 진 적이 없거든." 쇼치필리라니? 다음 메시지로 넘어가려는 것을 서둘러 후진 버튼을 눌러 되돌렸다. 몇 번을 다시 들었다. 분명 그가 알고 있는 사람들 중 이토록 화려한 목소리의 소유자는 없었다. 이 사내는 누굴까? ...장난전환가? 아니겠지. 목소리로 보아 나와 비슷한 연배 같은데 서른 넘 은 사내가 남자 목소리로 녹음된 응답기에 대고 이런 식의 장 난을 친다는 얘기는 여지껏 들어보지 못했다. 혹시 여자를 고 객으로 하는 신종 텔레폰 서비스 같은 건가? 그럴 지도 모른 다. 이런 목소리를 가진 남자라면... 왜 나한테 했는지는 모르 겠지만. 옷을 마저 벗다가 문득 열흘쯤 전에 응답기를 만졌던 것이 기억났다. 인사말을 바꾸려 했는데 적당한 멘트가 없어서 임 시로 야니의 피아노곡을 틀어놓았다. 시간날 때 다시 녹음해 야지 하고는 마감기간을 지내면서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러니 응답기는 음악만 내보내고 있을 것이다. 한준은 미소를 지었 다. 안됐군, 메탈 베이스 씨. 전화를 잘못 거셨어. 쇼치필리 양 이 아니라서 미안해. 다음부터는 전화번호 잘 확인하고 돌리 라구... 그나저나 쇼치필리라니 이상한 이름이다. 서양 여잔가? 아니면 별명? 샤워를 하면서 그 일은 거의 잊어버렸다. 자러 들어가다 생 각이 나서 응답기 앞에 앉았다. 괜찮은 말을 궁리해보았으나 1분 후에 포기하고 전에 쓰던 인사말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서한준입니다. 지금은 집에 없으니 말씀 남겨주시면 돌아 오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K일보사의 시사 월간지가 회의용 테이블 위로 내던져졌다. <양수리 토막 시체 유기 사건의 현장에서>, 눈에 확 들어오 는 붉은 타이틀이 주먹만하게 찍혀 있었다. "그쪽 사람들 희색이 만면하더군요. 그럴 만하죠, 발매 하루 만에 재판 들어갔다니까. 좀 물어봅시다. 일할 생각들이 있기 는 한 겁니까?" 침착하게 서두를 꺼낸 최정환 부장은 좌중을 한 사람 한 사 람 매섭게 쏘아보았다. 사무실 안은 쥐죽은 듯 조용했다. 최 부장, 통칭 최통은 '서울의 봄'부터 문민정부 수립까지, 5?6공 을 통산하는 20대 특종 중 다섯 건을 혼자서 따낸 인물이다. 누구나 뒤에선 어떤 욕을 하건간에 그 앞에서는 주눅이 들게 마련이었다. 양수리 인근의 야산에서 방수포로 싸인 일곱 구의 토막난 시체가 발견된 것은 나흘 전의 일이었다. 사건 자체가 가진 엽기성에다, 신체부위들로 장난을 쳐놓은 범인의 행위가 매스 컴의 핫 이슈로 떠올랐다. 그러나 월간 K를 제외한 월간지들 은 모두 강 건너 불구경이었다. 책은 이미 트럭에 실려 전국 으로 운송되고 있을 때였으니 말이다. "기사를 위해선 팔 하나쯤 아깝지 않다, 특종을 잡으려면 목숨도 걸겠다, 이 정도는 돼야 기자라고 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 회사, 자선단체 아닙니다. 꺼떡꺼떡 놀다가 마감 닥치면 별 볼일 없는 글 몇 줄이나 써내는 놈팽이들 먹여살릴 만큼 썩어나는 돈 없어요. 뛰어다니기 귀찮으면 사표 쓰세요. 화류 계 스캔들 따위에나 킁킁거리는 넝마주이가 아닌 진짜 기자 좀 데려오게 말입니다." 옆얼굴에 최 부장의 차가운 시선이 화살처럼 꽂혀왔지만 한 준은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이제쯤 면역이 될 법도 한데 그런 식의 기습적인 적의 앞에서는 아직도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 다. 부장은 한준을 노려보다가 의자를 부서져라 밀어내고 나 가버렸다. 여기저기서 투덜거리는 소리들이 비어져 나왔다. 하나둘씩 우그러진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 시작했다. 늦게 들어 와서 부장 눈치를 보느라 멀찌감치 앉아있던 송 선배가 한준 옆으로 왔다. "연예인 보고 화류계라니, 최통도 무식하긴.... 신경쓰지 마 라. 한 번 삐지면 육 개월은 기본이니 그냥 귓등으로 흘려." "일 년도 가겠어요." "인간이 저렇게 변할 수 있냐. 왕년의 최통이지 노후대책 시급한 나이 되니까 몸 사리는 건 다른 속물들과 한가지야." "이러다간 우리 것에 주간뿐 아니라 일간까지 하가 관련 기 사는 다 제가 떠맡게 되는 거 아닐까요? ...부장이 손수 떼밀 지 않아도 오늘 점심시간쯤 옥상에서 뛰어내려야겠는데요." "거, 주간부에 소문이 짜하던데... 어제 강영후가 무지 상냥 했다며?" "임 형이 얼마나 실망했다구요." "그랬을 거야, 그 촉새." "저거 읽어봤어요?" 한준이 테이블 한가운데를 점령하고 있는 월간 K를 가리키 자 송 선배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어, 쇼킹하던데. 쥐포도 그렇게 찢지는 않았을 거야... 근데 꼭 그렇게 해부학 강의를 해야 되냐? 발목 절단면에 덜 끊긴 힘줄들이 어떻게 너덜거렸다는 둥, 창자를 펴서 발라낸 등뼈 몇 줄을 순대처럼 싸놨다는 둥, 완전히 월간 정육점이더라 구.... 누가 썼을 것 같아?" "누군데요?" "박상우." "하긴, 박 선배 외엔 없죠." "쥐포 찢어논 게 그 자식인지도 모르지. 특종을 위해서는 지 엄마도 내다팔 놈이니까. ...어어, 점심 전에는 읽지 마. 햄 버거가 예사로 안 보인다구." 한준은 월간 K를 집어들고 몇 장 넘겨보았다. 게재한 사진 들은 모두 흑백으로 처리하고 군데군데 검은 칠을 해놓았으나 원래의 형태를 상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현장에는 범인 에 대한 어떠한 증거도 찾아볼 수 없었다. 범인은 마치 도살 하여 필요한 부분 다 떼낸 돼지를 버리듯 시신들을 유기했다. 현재 경찰의 손에 있는 것은 주인을 알 수 없는 신체조각들 뿐이다...> 서울지검 기자실은 한가했다. 문 앞에서는 서넛이 모여 잡 담하고 있고, 아침부터 소파에 누워서 코를 골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한준은 대충 눈인사를 한 후 자리를 잡고 앉아 월간 K를 펼쳐들었다. 양수리 기사를 반쯤 읽었을 때 누군가 그의 어깨를 쳤다. 검찰청 출입하면서 알게 된 월간 K의 권 기자였다. 권은 한준 에게 자판기에서 뽑아온 커피를 건네며 말했다. "의정부 지청은 불난다는데 여긴 참 썰렁하네. 고법으로 넘 어와야 북적북적하겠지만 글쎄, 넘어올 수나 있을는지. 원체 좌우 십 리가 안개 속이라.... 기가 막히지?" 권은 펼쳐진 페이지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역시 박 선배잖아? 양수리로 뜨기 바로 전날까지 우리하고 밤새 마감 축하주 꺾었다면 믿겠어?" "권 형도 몰랐다구?" "대외 대내 보안철저였어. 데스크랑 둘이서만 쿵쿵따리 한 거야. 저번에 서 형한테 당했던 것 때문에 되게 열받았나봐." "그럴 게 뭐 있어. 결과적으로 보면 오히려 잘된 일이었잖 아. 우리 회사 그 기사 때문에 망할 뻔했던 거 몰라?" "박 선배는 그렇게 생각 안하니까 문제 아냐. 서 형, 콱 찍 혔다구." "찍히기로 치자면 최통한테 당하는 도끼만행으로도 벅차. 참아달라고 해줘." 호출기가 울려서 보니 회사였다. 전화한 그에게 들어오라고 했다. 아까 나올 때까지만 해도 별 소리 없다가 갑자기 내근 이라는 거였다. 한준은 웃고 말았다. 어차피 화내봤자 소용없 는 일이었다. 예, 부장님 마음대로 하세요. 괜찮습니다. 화장실 청소라도 하라시면 해야죠. 주차장으로 가는 중에, 마침 올라오고 있던 수사과의 황태 수 계장과 마주쳤다. 어두운 얼굴을 숙이고는 한준이 바로 앞 에서 인사를 해도 알아보지 못하고 지나갔다. "계장님!" "어?" 황 계장은 흠칫하며 고개를 들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열심히 하세요? 코 베가도 모르시겠어 요?" "응, 자네로군." "언제 오셨어요?" "어젯밤에." "일주일이나 어딜 가셨던 건데요?" "저기 좀." "저기가 어딘지 좀 알면 안될까요?" "뭐 특별히 얘기할 거 있나." "에이, 그러지 마시구요. 이따금은 괜찮은 것도 건져야 자리 보전하죠. 회사, 지금 월간 K 때문에 시베리아거든요." "월간 K? 양수리 일 말이야?" "예." 황 계장은 얼굴을 문지르며 먼 산을 쳐다보았다. "몸 조심해. 항상 긴장하고 있으라구." "뭘 말씀입니까?" "미친 짐승들이 도처에 널렸어. 모두가 위험해." 황 계장의 심각한 말투는 오싹했으나 한준은 일부러 웃어넘 겼다. "계장님.... 괜히 겁주지 말고 기사거리나 주세요, 예?" 황 계장은 대답없이 한준의 옆을 지나가며 혼잣말처럼 중얼 거렸다. "대체 어디까지 끌고나갈 셈이지? 미친 자식들..." 한준의 아버지 고향 후배인 그는 한준이 어렸을 때부터 보 아온 사람이었다. 말해 줄 생각이 없을 때는 하늘이 두 쪽 나 도 입을 열지 않는 성격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단념하고 몸 을 돌리려 할 때 황 계장이 한준을 돌아보았다. "내가 목숨을 걸어야 할 일을 도와달라고 하면 어떻게 할 건가? 도망칠 건가?" 한준은 뜻밖의 말에 어리둥절해서 그의 안색을 살폈다. 농 담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한준이 대답할 때까지 움직이 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도망 안 칩니다." "진심이야?" "물론이죠." "...약속했네." "약속했습니다." 그는 한준을 향해 팔뚝을 불끈 치켜들었다. 한준 역시 주먹 을 쥐고 마주 흔들어 보였다. 한준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펀 팩토리의 CD를 틀었다.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언제나 하는 달밤의 체조를 시작했다. 음악에 맞춰 옷을 벗어던지고, 거실 한가운데에서 한참 춤추 다가 구석에 처박혀있던 잠옷을 발견했다. 노래를 따라 부르 며 잠옷을 입고 응답기를 재생시켰다. "옷 갈아입는 중이었나, 쇼치필리?" 메탈 베이스가 부드럽게 물어왔다. 한준은 깜짝 놀라 응답기를 돌아보았다. 나지막한 웃음소리 가 흘렀다. "벗어버려. 아무 것도 걸치지 마. 그깟 생명없는 천조각 따 위로 네 눈부신 육체를 숨기지 말아.... 샤워할 시간이지, 쇼치 필리? ...휴... 물줄기가 네 몸을 타고 흐르는 모습은 정말 섹 시할 거야. 생각만 해도 참을 수가 없군. 아랫배까지 굳어버렸 어. ...네 혀는 감촉이 어떨까? 그 붉은 입술은? ...하, 흐흡..." 거친 숨소리가 계속되었다. 끊어진 후에도 한준은 꼼짝않고 서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천천히 손을 뻗어 응답 녹음을 틀었다. "서한준입니다. 지금은 집에 없으니 말씀 남겨주시면 돌아 오는대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잘못 걸린 전화가 아니었다. 한준은 음악을 끄고 소파 팔걸이에 걸터앉았다. 내가 항상 응답기를 틀어놓은 채 옷을 갈아입는 걸, 그 후에는 샤워를 한다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 는 내가 녹초가 됐던 걸 알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파고 들 어왔다. 위험, 위험, 위험, 위험. 아니, 아니야. 이성적으로 생각하자. 그저 우연히 들어맞은 것 뿐이다. 대부분 밤에는 직장에서 돌아와 피곤해 하고, 옷 갈아입고, 샤워하니까. 그래... 간단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자동 응답기를 사용하는 집이면 남자 음성이건 여자 음성이건 상관없이 장난을 치는 거다. 남자는 더 황당해 할테니까 특히 표적으로 삼을 수도 있겠지. 별 것 아니다. 며칠간 응답기를 꺼놓으면 그만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늦었다. 지독한 기억이 난마처럼 온몸을 헤집 어놓고 있었다. 한준은 거세게 머리를 흔들었다. ...빌어먹을, 그만둬. 기억하고 싶지 않아... 제발... 제발 그만 두라니까! 제 2장 <핏빛 기억?Ⅰ> 2월의 날씨로는 드물게 포근한 토요일이었다. 한준은 친구 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로 가고 있었다. 뒤에서 자전거가 오는 기척이 났다. 한준은 시계를 보면서 걸음을 재촉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니?" 옆으로 다가온 자전거 위에서 한 사내가 말했다. 삼십 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서글서글한 인상의 남자였다. "약속시간에 늦어서요." "무슨 약속인데?" "친구들하고 영화 보기로 했어요." "J극장에서?" "예." 그는 한준과 나란히 갈 수 있도록 천천히 페달을 밟았다. "이름이 뭐지?" "서한준요." "초등학생?" "중학교 올라가요." "어딘데?" "선일중이요." "네 자지는 누가 만져주지?" 한준은 사내를 쳐다보았다. 잘못 들었나 해서였다. "털은 얼마나 났어? 새콤한 냄새가 난다." 입안에 침이 가득 고여있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내는 슬며시 손을 뻗어 한준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내가 빨아줄께, 한준아. 기분이 아주 좋단다." 그는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한준은 소름이 오싹 끼쳤다. 전속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장소는 모퉁이 돌아 바로였다. 아이들과 합류하고 둘러보니 사내는 사라지고 없었다. "뭐 하느라 이십 분이나 늦냐? 영화값 니가 다 내!" 한 차례 왁자하게 지청구를 들었다. 친구들과 한 블럭 떨어 진 J극장으로 몰려가면서 한준은 사내의 일을 잊어버렸다. 본영화가 시작되고 십 분쯤 지났을 때, 한준의 왼편에 앉아 있던 여고생들이 좌석열 끝의 누군가와 잠시 다투는 것 같더 니 "재수다 정말" 하면서 자리를 옮겼다. 한준은 영화에 푹 빠 져서 옆자리에 누가 와서 앉는지 관심도 없었다. 큼직한 손이 허벅지 위에 놓였다. 흠칫해서 고개를 돌린 곳 에 웃고 있는 사내의 얼굴이 있었다. 한준은 가까스로 비명을 억눌렀다. 친구들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모두들 영화에 정 신이 팔려 있었다. 허벅지를 주무르며 슬슬 위로 올라오고 있 는 손을 밀어내려 안간힘을 썼으나 두 손으로도 사내의 손가 락을 떼어낼 수가 없었다. 사내가 한준의 사타구니를 움켜쥐 었다. 바지 지퍼가 내려갔다. 축축한 손이 팬티를 헤집고 들어 왔다.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일어서는 한준을 팬티 속에 들 어있는 손이 무서운 완력으로 주저앉혔다. "왜 그래?" 옆자리의 친구가 물어왔다. ...봤을까? 머리가 아찔했다. 친구들에게 이런 꼴을 들킬까봐 너무나 무서웠다. 한준은 엉거주춤 몸을 굽혀 바지 앞섶을 가 리며 최대한으로 태연한 목소리를 냈다. "아니, 그냥... 화장실 좀 가려고." 친구가 고개를 돌린 후에도 긴장하여 꼼짝할 수가 없었다.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화면만 응시하고 있었다. 사내는 여유 있게 한준의 성기를 주물러댔다. 다른 손으로는 한준의 손을 끌어다 자신의 다리 사이에 갖다대고 몇 번 바지 위에서 문지 르게 하더니, 팽팽해진 지퍼를 열었다. 발기하여 맥박치는 음 경이 튀어나왔다. 한준에게 억지로 쥐게 했다. "네 이쁜 손으로 문질러줘.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쌀 것 같았다구..." 사내가 뜨거운 입김을 뿜으며 귀에 대고 속삭였다. 소름끼 치게 헐떡거리고 있었다. 그에게서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허 사였다. 사내는 한준의 음낭을 손에 쥐고 한 쪽씩 굴리며 뺨 을 깨물었다. 사내의 것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이 세차게 꿈 틀거렸다. 한준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사내를 있는 힘껏 떠 밀어 버렸다. "어, 한준아! 왜 그래?" "어디 가는 거야?" 옷도 제대로 여미지 못하고 뛰어나가는 등 뒤로 친구들의 목소리가 와글와글 따라왔다. 한준의 머리 속에는 어서 이 자 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영문을 모르는 친구들이 계속 전화를 해댔지만 한준은 이불 을 뒤집어쓰고 누워만 있었다. 무슨 일이냐는 어머니의 성화 에도 묵묵부답이었다. 밤늦게 들어온 아버지가 한준의 방으로 왔다. 이불을 뺏긴 한준은 땀으로 범벅이 된 창백한 얼굴을 떨구고 말없이 앉아 있었다. "뭐야? 왜 그러는 거야?" 아버지는 고함부터 질렀다. 몇 번 윽박질러도 입을 열지 않 으니 언제나처럼 손찌검으로 이어졌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 고 있던 어머니가 달려들어 아버지를 끌어냈다. "참으세요. 지금은 별로 말하고 싶지 않나봐요... 그만 두시라니까요." "당신이 그렇게 싸고 도니까 애새끼가 점점 못나지잖아! 우 리 집안엔 저런 병신새끼 없다구!" 한준은 코 밑에 손바닥을 대어 떨어지는 핏방울을 받았다. 휴지가 바로 지척에 있었지만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얼마 후 에 다시 들어온 어머니가 휴지를 찢어서 피를 닦아주었다. "어휴, 이 일을.... 피가 안 그쳐서 어째." "......." "성격이 급해서 저러신다. 아버지 이해해라, 한준아. ...널 사 랑하셔." 한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어머니 마음이 편하다면 고개쯤이야 얼마든지 끄덕여줄 수 있었다. 맞을 때마다 듣는 그 소리 귀에 못이 박혔어. 사랑? 저런 인간은 어디 가서 콱 죽어버리라고 해. 중학생이 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특 별하게 새로운 일은 없었다. 같은 학교에서 온 아이들이 얼마 없어 처음에는 서먹했으나 금세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다. 매일 방과 후에는 편을 갈라 축구 비슷한 놀이를 했는데, 집 에 가는 시간을 늦춰주는 일이었기 때문에 한준은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날도 주변의 식별이 어려울만큼 어둑해지고 나서 놀이가 파했다. 3월의 쌀쌀한 날씨였지만 수돗가에 몰려가서 웃통을 걷어붙이고 물을 끼얹을 정도로 땀을 흘렸다. "야, 너 모형 비행기 있다며?" 누군가가 한준 옆에서 씻고 있던 안경쓴 아이한테 소리쳤 다. 모두 우와아 하는 표정으로 안경을 쳐다 보았다. "응, 아빠가 일본 다녀오면서 사왔어." 안경이 우쭐해서 대답했다. "U컨트롤이야, 라디오야?" "얼만데?" "엔진은 뭐야?" "2기통 디젤 엔진이야. 라디오 컨트롤이구... 우리나라에선 돈 있어도 못 사는 거야." 한준은 대충 물기를 닦고 떠들썩한 사이를 빠져나왔다. 거 리는 벌써 가로등이 켜져 있었다. 안경의 아버지는 시간날 때마다 안경과 함께 백화점에 가서 이것저것 사주고 안경이 뭘 잘못해도 너그럽다고 했다. 주말 엔 가족과 외식하는 아버지, 다정하고 따뜻한 아버지. 찌링찌 링, 찌링찌링, 자전거 벨 소리가 점차 가깝게 들려왔다. 한준 은 모형 비행기를 생각했다. 서점에 진열된 외국잡지에서만 보던 그 날씬한 날개의... "모형 비행기가 갖고 싶어?" 한준은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자전거를 탄 그 사내가 바로 옆에 와 있었다. 한준은 펄쩍 뛰어 물러섰다. "여...여기 어떻게..." "네가 가르쳐줬지 않아, 선일중이라고." 사내는 온화하게 말했다. 한준은 잔뜩 경계하며 사내에게 최대한 떨어져서 뛰듯이 걸었다. 사내의 목소리가 따라왔다. "모형 비행기가 필요하면 내일 여섯 시까지 J극장으로 와. 갖고 싶은 대로 줄 테니까." 다음날 오후 여섯 시 십 분에 한준은 J극장 앞의 횡단보도 를 건너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던 사내가 웃으면서 손짓을 했 다. 사내와 함께 간 곳은 미로 같은 골목 끝에 있는 여관이었 다. 그는 방 한 켠에 세워놓은 큼직한 가방을 열어 한준 앞에 밀어놓았다. 다양한 종류의 모형 비행기가 가득했다. 한준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탄성을 질렀다. "이거 진짜 날아요?" "보여줄까?" 사내는 선수급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모형 비행기는 까 마득히 날았다가 추락하듯 곤두박질쳐 바닥에 닿을 만큼 저공 비행을 했다. 전봇대를 몇 바퀴 맵시있게 돌아 다시 창문으로 날아들어왔다. "네 거야." 사내는 사뿐히 착지한 모형 비행기 위에 리모콘을 얹어서 한준의 손에 쥐어주었다. "정말요?" "정말이고말고. 내 말만 들어주면 나머지도 모두 가질 수 있어. 한 번에 한 개씩... 어때?" 한준은 머뭇거렸다. 뿌리치고 나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 었으나 비행기가 너무 탐이 났다. "...안...가질래요. 어떻게 작동하는지도 모르고..." 한준은 필사의 힘을 발휘하여 그것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사내는 느긋하게 웃었다. "가르쳐줄께. 어렵지 않단다. 난 좋은 선생이거든. 여러가지 면에서..." "......." 한준은 사내가 바지를 벗는 것을 보고 있었다. 한 달도 안되어 친구 방 벽장 속에 숨겨뒀던 모형 비행기들 이 들통나고 말았다. 친구의 어머니는 아들을 닦달하여 한준 의 소유라는 것을 알아내자 그것들을 모두 담아가지고 집으로 찾아왔다. 이렇게 비싼 걸 부모 몰래 살 수는 없을 테니 합법 적인 물건은 아닐 거다, 물론 한준이 같은 모범생이 혼자서 한 일은 아닐 것이고 불량한 친구들의 꾐에 빠져 잠시 실수를 한 것 같으니 더 어긋나지 않게 타일러 달라, 대략 그런 요지 였는데 문제는 아버지도 옆에서 듣고 있었다는 것이다. 한준 은 사흘간 학교를 결석했다. 온몸이 시퍼렇게 부어올라 눕지 도 앉지도 못했다. 저 사람이 아버지라고? 개새끼, 제발 죽어 버려라.... 통금은 오후 다섯 시였다. 수업 끝나자마자 달려와 아버지 의 전화를 받아야 했다. 사내가 계속 학교 주위를 맴돌았다. 한준은 자전거 소리만 나면 긴장하게 되었다. 한 번은 먼발치 에서 그를 보고 숨었는데 지척으로 스쳐가는 그의 두 눈이 벌 겋게 충혈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한준은 꿈에서 그 눈을 보 고 놀라 깨곤 했다. 학교가기가 무서웠지만 사내의 얘기를 부 모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날은 주번일이 늦게 끝나 다섯 시 사십 분에 동네 어귀로 뛰어들어 가고 있었다. 다섯 시의 확인 전화를 안 받으면 아 버지가 달려왔다. 평소 잘 다니는 수퍼의 주인여자가 "학교 갔다 오는구나" 하며 아는 척을 해도 대꾸할 겨를이 없었다. 집이 있는 골목으로 막 꺾어들려 할 때 뭔가에 세차게 부딪 쳤다. 사내는 자전거를 내팽개치더니 넘어져 있는 한준에게 다가왔다. 한준은 멱살을 잡혀 끌려갔다. 환풍구들이 늘어서 있는 상가 뒤의 으슥한 골목은 일 년 열 두 달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소리친다고 누가 듣지도 못했다. 사내는 한준을 벽에다 밀어붙이고 교복 바지를 찢었다. 한준 이 저항하자 목을 졸랐다. 지독한 힘이었다. 머리에 피가 몰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사내는 한준의 다리 하나를 어깨 에 걸치고 다른 한 쪽은 옆구리에 끼었다. 사내의 성기가 그 대로 밀고 들어왔다. 한준은 벽과 사내 사이에 낀 채로 꼼짝 못하고 당하고 있었다. 갑자기 사내가 빠져나갔다. 한준은 털썩 땅에 떨어졌다. 새파랗게 질린 아버지가 사내를 사정없이 두들겨팼다. 한준 은 멍하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여긴 웬일일까. 아... 수퍼 아 주머니가.... 사내는 맞고만 있었다. "...어,어떻게 이런... 짐승 같은 놈! 미,미친 새끼..." 한준은 아버지가 말을 더듬는 것을 처음 들었다. 어머니가 저만치서 뛰어왔다. 하의가 벗겨진 채 쓰러져 있 는 한준과 피범벅이 된 사내를 보고는 헉 숨을 들이마셨다. "여보, 그만둬요! 죽일 참이에요?" 어머니는 아버지의 허리춤을 붙들고 매달렸다. 아버지는 어 머니를 뿌리치려 펄펄 뛰었으나 어머니 역시 필사적이었다. 아버지에게 멱살이 잡혀있던 사내가 부러진 이를 뱉어내며 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는 느물느물하게 말했다. "당신이 쟤 애비요? 정말 맛 좋은 아들을 뒀수다. 부럽네.... 당신은 맨날 먹겠지?" "뭣?" 아버지의 주먹이 사내의 턱을 강타했다. 고개가 홱 돌아간 사내가 히죽 웃는 것을 한준은 똑똑히 보았다. 위험 위험 위 험 위험. 찢어질 듯한 경고의 비명이 한준의 머리 속을 가로 질렀다. 사내의 손이 품에서 빠져나왔다. 뭔가 가로등 불빛에 번쩍인 순간 섬뜩한 파육음이 일었다. 사내는 피가 흐르는 긴 칼날을 아버지의 가슴에서 뽑아냈 다. 아버지는 눈을 홉뜨고 있었다. 입가로 거품섞인 핏물이 부 글거렸다. 사내에게 떼밀린 아버지는 베어진 나무처럼 쓰러졌 다. 사내는 낄낄 웃으면서 아버지의 눈에 칼날을 끝까지 박아 넣었다. 아버지의 목덜미를 뚫고 비어져나온 칼끝이 핏방울을 떨구 며 가로등 불빛에 빛나고 있었다. ...눈 위로 기괴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솟아있는 검은 손잡이... 어머니의 비명소리가 아득 하게 들려왔다. 저런 인간은 어디 가서 콱 죽어버리라고 해. 저 사람이 아 버지라고? 개새끼, 제발 죽어버려라. 한준은 의식을 잃었다. 제 3장 <외아들 클럽> 카바티나에 도착한 것은 아홉 시 십 분이었다. 넓은 홀 안 은 평소에 비해 꽤 한산했다. 홍재와 만날 때면 늘 지정석으 로 앉는 자리가 있었기 때문에 두리번거릴 것 없이 홀을 가로 질렀다. 중앙의 모퉁이를 돌자 이쪽을 보고 앉아있던 홍재가 손을 흔들었다. "아하, 이게 누구셔. 야, 서한준!" 혀 꼬부라진 시비조의 음성이 쩡 하고 울렸다. 한준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테이블에 박상우가 반쯤 누워 있었다. K일보사 와 가까운 카바티나에 박상우가 자주 퍼져있곤 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그렇게 딱 마주치기는 처음이었다. 홍재가 일어서는 것이 보였다. 한준은 그에게 가만 있으라는 눈짓을 했다. "안녕하세요." 껄끄러웠지만 모른 척할 수도 없어서 인사를 건넸다. 박상 우가 자기 옆자리를 두들기며 소리를 질렀다. "앉아! 한잔 빨라구!" "일행이 있습니다만." "뭐야?" "죄송합니다. 나중에 뵙죠." "하, 이거 이거, 아주 웃기는 자식이네. 아쉬울 때는 간이라 도 빼줄 것처럼 살살거리더니, 뭐? 나중에 뵙쬬오?" "박 형, 그만 일어서십시다. 많이 취하셨어." 일행 둘이 그를 달래며 양쪽에서 부축해 일으켰다. "아아, 이러지 마슈. 나는 한강을 소주로 채워 마셔도 이 자 식만 보면 확 깨는 사람이야. 명색이 대학 후배란 놈이 날 가 지고 공놀이를 했다구. 나쁜 새끼..." "무슨 일이요?" 어느새 다가온 홍재가 한준 옆에서 물었다. 키가 이 미터에 팔뚝이 남들 넓적다리만하고, 더구나 인상까지 덩치값을 하는 남자는 한 번 주위를 훑어보기만 해도 반경 십 미터 이내가 텅 비는 법이다. "죄,죄송하게 됐습니다." "뭐야, 저 자식한테 할 말이 있단 말이야!" 일행은 버둥거리는 박상우를 떠메다시피 하면서 줄행랑을 놓았다. 홍재가 픽 웃었다. "왜들 저래, 어디 아픈가?" "네 얼굴 보고 도망 안 가는 사람이 아픈 거지." "헐뜯지 마, 임마." "다들 왔어?" "민호는 아직. 근데..." 자리에는 오규섭과, 홍재의 동생 정혜연이 앉아 있었다. 한 준은 그녀를 보고 내심 긴장했으나 얼굴에는 나타내지 않았 다. "저 골칫거리가 따라왔어." 홍재가 혀를 차며 말했다. 정혜연의 눈꼬리가 단박에 치켜 올라갔다. "뭐야?" "혜연이 보니까 반가운데 뭘 그래. 저번에 패션쇼 좋더라. 수석 디자이너 될려면 얼마나 더 있어야 하는 거야?" 그녀는 웃지도 않고 힐끗 한준을 쏘아보았다. "오늘 우리 오빠 생일인 거 모르고 왔죠?" "어?" 한준이 놀라서 쳐다보자 홍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 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맞구나. 야, 미안하다. 어쩌냐?" "뭘 어째 임마. 냅둬." "규섭이 넌 좀 가르쳐주지 그랬어." "알고 있는 줄 알았지." 오규섭이 특유의 느린 어조로 대꾸했다. 얼마 전에 봤을 때 보다 얼굴이 많이 좋아져 있었다. 한준은 그의 어머니 소식이 궁금했으나 이 자리에서 물어도 될지 망서려졌다. 오규섭의 어머니는 만성신부전으로 만 2년째 혈액투석을 받아오고 있었 다. 일주일마다 두 번씩 해야 하는 그 작업으로 진 빚 때문에 선친에게서 물려받은 출판사마저 넘겨야 할 형편이었다. "아까 그놈은 뭐야?" 홍재가 담배를 피워물며 한준에게 물었다. "월간 K 기자야. 저번 남유미 기사 낼 때 내가 잘못했거든." "남유미 기사? 그, 강영후 깐 거?" "응." "하여간 그 강가놈은 맛 좀 봐야 했는데. 너무 싱겁게 끝나 버렸잖아, 젠장." "오빠가 그런 말하면 다 웃어. 졸부 자식이 클래식한 귀족 질투하는 거라구 말야." "별 클래식 같은 소릴 다 듣겠군. 게다가 질투라니 누가..." "가만 있어도 밑에서 받쳐주고 뒤에서 밀어주고 위에서 끌 어주는 그런 자리가 질투 안 난다구? 법적으론 누구나 평등한 세상이니까 대학도 같이 다녔지만 평생 레저타운 사장이나 하 다 끝날 오빠하고 강영후 선배는 완전히 격이 다른 인생이잖아?" "그래, 그놈 인생 눈부셔. 근데 내 생일날 그런 얘길 하는 저의가 뭔데? 기분 나쁘니까 너 빨리 가버려." "나잇값 좀 하란 말야." 정혜연이 차갑게 대꾸했다. 혼잣말로 뭐라고 투덜거리던 홍 재가 갑자기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주위 테이블의 시선이 기둥을 돌아 이쪽으로 오고있는 한 남자에게 홀린 듯 쏠려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자수정 넥타 이핀과 짙은 녹색 스리피스 정장의, 그림 같은 미남자였다. 그가 일행 옆에 와 서자 차가운 듯 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흘렀다. 그는 아직까지도 대학 입학 선물로 한준이 줬던 상표 의 오드콜로뉴를 쓰고 있었다. "질렸다. 열 시다, 열 시. 이년만에 친구들 만나면서 늑장부 려? 박사라고 재냐?" 홍재가 계속 타박을 주려 하자 정혜연이 눈을 흘겼다. "반가워요, 오빠. 내 얼굴 잊은 건 아니죠?" 백민호는 말없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정혜연이 백민호에게 몸을 비켜 옆자리를 내주는 것을 오규섭이 우울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백민호가 홍재에게 봉투 한 장을 내밀었다. "무성의해 보여도 이해해라. 선물 살 시간이 없었어." "괜찮아. 너보다 더한 놈도 있는데 뭘." 한준이 탁자 밑으로 숨는 시늉을 하자 모두 웃었다. 홍재가 백민호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신수가 훤하다. 완전히 미국놈 다 됐네. 살 만하냐?" "너도 한 달 후면 캐나다 갈 거라면서?" "어디 가서 처박히든 된장국이 수프 되겠냐. 젠장, 솔직히 안 가고 싶다." "가기 싫으면 그냥 있어. 니들 그렇게 하나 둘 떠나니까 정 말 허전해. 민호도 얼마나 보고 싶었는데." 홍재와 백민호가 동시에 한준을 바라보았다. 홍재가 둘째 손가락을 세워 한준의 눈 앞에 대고 좌우로 흔들었다. "야, 괜히 사람 기대갖게 하지 마. 그 말 믿고 너한테 퍽 엎 어져버리면, 나 책임질 수 있어?" 정혜연이 보일 듯 말듯 눈살을 찌푸렸다. 오규섭이 말머리 를 돌렸다. "민호 너, 완전히 들어온 거야? 학교에서 교수 자리 준비해 놓고 기다린단 말이 있던데...." "사양했어. 두 달 있다가 다시 나가야 해." 한준은 백민호를 보며 고등학교 입학식날을 생각했다. S대 자연계 수석으로 진학하고, MIT에서 학위를 받는 등 그 입학 식으로부터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그는, 꽃다발을 받던 신 입생 대표 백민호의 예민하고 냉정한 얼굴 그대로였다. 그가 중 1 때까지 외국에 있었다는 것과 외무장관의 아들이란 것은 같은 반이 되고 나서 얼마 후에 소문으로 알게 되었다. 그런 배경 때문에 그는 주먹깨나 쓰지만 집안 형편은 불우한 아이 들의 표적이었다. 전교적으로 인기가 좋았던 한준과, 한준이 돕자 무조건 같이 도와줬던 주먹왕 홍재가 없었다면 무사히 졸업하지 못했을 것이다. 시선을 느낀 듯 백민호가 한준을 바라보았다. "저번엔 잘 들어갔어? 파티 끝나고 찾아보니까 벌써 가고 없던데." "응, 마감 때문에. 수당 오백 십원 더 받고 주간부 일까지 몸바쳐 충성하거든." "무슨 얘기 하는 거야?" 홍재가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백민호가 대답했다. "하가 호텔 개관 리셉션에서 만났었어." "뭐, 하가 호텔? 야야, 마감도 쫓겼겠지만 한준이가 어떻게 그 자리에서 오래 개길 수 있냐? 멍석말이 안 당한 것도 하늘 이 도우신 거다." 한준이 웃으며 말했다. "안그래도 강 회장 비서실장이 엄청 인상을 구기고 있더라 구. 주위 시선 없었으면 살아 나오지 못했을 거야." 음식이 차려졌다. 홍재가 모두의 잔에 술을 채워주고 건배 를 했다. 오규섭이 백민호에게 물었다. "유재웅 박사도 왔었어?" 한준이 대신 대답했다. "홍재만한 덩치가 여자들 속에 파묻혀서 얼굴만 보이더라. 서른 셋 먹은 재벌 2세가 미혼이니 강영후 찜쪄먹는 아방궁에 살겠지." "사생활은 잘 모르겠지만 그 사람, 인술을 베푸는 의사야. 유 박사 덕택으로 어머 니 성일병원으로 옮겨서 이달 말에 신장 이식 수술 받으시게 됐어." 홍재가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야, 진짜 잘됐다. 이제 고생 끝나셨구나." 한준이 물었다. "정신과 의사가 어떻게 어머니를 알게 된 건데?" "주치의하고 아는 사이더라구. 아무 조건 없이 도와주겠다 는 거야." 한준은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으나 오규섭이 기분상해할까봐 가만히 있었다. 2년 전,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기 위해 귀국한 유재웅을 최 부장이 직접 인터뷰하여 특집으로 다뤘다. 그는 국내 유수 의 제약회사와, '성일聖日'이라는 이름으로 전국 열 두 지역에 지원을 둔 종합병원을 소유한 의료재벌 유남권의 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미국에서 자란 그는 월반에 월반을 거듭해 스물 한 살에 존스 홉킨스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고, 서른에는 최 면 의학의 톱 클래스로 인정받아 미국 정신의학 협회가 선정 한 정신과 전문의 십 걸 안에 들기도 했다. 한준은 그를 두꺼 운 안경을 낀 골샌님일 것으로 생각했다가 야성미가 물씬 풍 기는 얼굴을 하고있는 동물적인 근육질임을 보고 놀랐던 기억 이 있었다. "이거 의왼걸. 외아들 클럽 회장이 맘뽀를 그렇게 곱게 쓰 다니." 홍재가 웃으면서 말했다. 정혜연이 빈 와인잔을 밀어내며 한 마디 했다. "회장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아? 그리고 그런 클럽이 있다는 것도 안 믿겨져." "외아들 클럽이라니?" "야, 넌 강영후를 그만큼 까발겼으면서 외아들 클럽도 몰 라? 기사 뭘로 썼냐?" "한준이가 어떻게 알겠어. 우리 학교도 아니었는데." 오규섭이 말했다. 홍재가 정혜연의 잔을 채워주며 킥킥 웃 었다. "그러게 공부 좀 할 것이지. 안 그래, 지진아 군?" "오빠는 체육 특기생으로 들어간 주제에 누구 말을 하고 있 어?" "넌 좀 가라니까 왜 여태 있는 거야?" "우리 대학 다닐 때, 입김 센 집 외아들 일곱 명이 결성한 클럽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어. 강영후하고 유재웅 박사도 회 원이라는 거야." 오규섭이 설명하자 정혜연이 옆에서 거들었다. "우리 학교, 강 선배 때문에 아즈테카 붐이었어요. 여학생들 사이에서는 특히 대단했죠. 강 선배 유학간 후로 잠잠해졌지 만" 한준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아즈테카라면... 스페인 침입 전에 멕시코의 중앙고원에서 발달했던 문명 말이야?" "지진아가 역사공부는 좀 했네. 외아들 클럽이 그 시절을 그리워한대." "누가 퍼뜨렸던 험담인진 모르지만 정말 악질적이야. 있는 집 자식 질투하는 건 우리 오빠뿐 아니라니까." 한준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그게 왜 험담이야?" "역사책 한 번 뒤져보세요. ...아즈테카의 주식이 사람고기였 던 건 알죠?" 한준은 좀 놀랐다. 강영후의 짐승 같은 눈이 머리 속을 스 쳤다. 확실히 그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는 인물 이었다. 안개 속의 어떤 것이 잡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 즈테카라.... 그때의 심증은 아마 그런 종류의 것이었는지도 모 른다. 넉 달전, 한참 줏가를 올리고 있던 신인가수 남유미가 실종 되었다. 한 달 가까이 연락 한 마디 없이 집과 소속 프로덕션 에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녀를 보았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 었다. 경찰의 불평처럼 땅으로 꺼진 것이 아니면 하늘로 솟았 다. 털끝만한 단서도 남기지 않고 말 그대로 '증발'해버렸다. 그런 돌연한 실종은 2년 전, 최고의 영화배우로 군림하던 민 은정 사건 이후 두 번째였다. 그때도 수사는 미로 속을 헤매 다 7개월만에 '자살로 추정됨' 어정쩡하게 종결되고 말았었다. 민은정 때는 하늘이 무너진 듯 떠들어대던 매스컴이 남유미 에게는 이상하도록 냉담했다. 그대신 악성 루머만 무성했다. '남유미가 짧은 기간에 급성장을 할 수 있었던 건 다 까닭이 있는 일이다, 같이 안 잔 PD가 없다더라.' '야쿠자 현지처라 폭력배를 끼고 상습적으로 라이벌들을 해코지했다.' '원래 텍 사스촌 스타였는데 동남아 수출용 포르노를 몇 편 찍은 것이 어느 방송국 PD 눈에 띄어 발탁됐다.' '중증의 마약중독?히스 테리 환자여서 전신에 자해한 칼자국 등 흉터가 가득한데다 어디어디에는 어떤 문신이 있어서 항상 긴 옷만 입었다더라. 방송가에선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워낙 빽이 있어서 쉬쉬하며 덮어둔 것이다.' '타고난 색정광이라 데뷔 후로도 관계한 남자 명단이 대학노트 열 권 분량이다. 그 남자들 가운데 누군가한 테 살해당한 거다' 또는 '벌써 시체가 인수되었다' 등등. 누가 퍼뜨린 얘기인지는 연예계의 속성상 짐작 못할 것도 없었다. 한준 역시 그 사건을 배당받기 전에는 남유미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았으나, 취재를 해 나가면서 그 소문의 터무니없음에 놀라고 말았다. 그녀는 마약중독자도 성격파탄자도 아닌, 그저 끼 있고 예쁜 여자일 뿐이었다. 특히, 그녀가 데뷔 후 사귄 남 자는 사회적으로 아주 유명한 유부남, 단 한 명이었다. 취재과 정에서 우연히 알게 된 바에 의하면 그 남자는 민은정이 실종 되기 직전의 연인이기도 했다. 민은정과 2년이 넘게 사귀었는 데도, 그 당시 너나 없이 시시콜콜히 까발려댄 민은정의 애정 편력 명단에서 빠져있었던 그는 하가 그룹의 후계자 강영후였 다. 한준은 복잡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마치 새끼줄이 떨어져있 길래 주워왔는데, 자세히 보니 그 끝에 소가 매어있더란 격이 었다. 상황에 따라서 호재일 수도 악재일 수도 있는 얘기지만 이 경우는 누구에게나 후자일 터였다. 어째서 매스컴이 남유 미를 내굴려버렸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풋내기 가수의 실종 쯤을 가지고 하가 제국에 덤벼들 바보는 없었다. 몰라서 못 쓴 것이 아니고 알면서도 덮어둔 것이었다. 부장은 대략의 추 이를 듣자 혀를 차더니 손떼라고 했다. 남유미에게 동정을 느 끼고 있었지만 한준 역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2주 정도 지났을 때, 한준은 구내식당에서 그녀 집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옆집에 살던 친척은 주위의 냉대 를 견디다 못해 지방으로 이사갔고, 병석의 아버지는 딸의 일 로 충격을 받아 며칠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고 했다. 게다가 소속 프로덕션에서 계약 파기에 대한 손해배상을 청구하여 재 판 중이며 만약 패소하게 되면 가족이 모두 길바닥으로 나앉 아야 한다는 것이다. 한준은 밥맛이 싹 달아나 몇 입 뜨지 않 은 수저를 놓아버렸다. 그는 그날 퇴근하고 남유미의 집에 가 보았다. 골목을 돌아들다가 그 자리에 멈춰섰다. 그녀의 이층 집은 유리창이 모두 깨져 있었다. 대문 앞에는 쓰레기차가 부려놓은 것처럼 산이 되어 쌓여있는 오물로 발 디딜 곳이 없었다. 화장실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지저분한 낙서들이 담벽을 뺑 돌아 붉은 스프레이로 도배되어 있었다. 도둑 고양이 한 마리가 잽싸게 지붕 위를 뛰어 달아났다. 악 취가 진동하는 괴괴한 골목은 마치 흉가를 연상시켰다. 한준은 충격을 받아 멍해진 머리를 가로저었다. 이런 짓을 한 건 어떤 사람들일까? 단지 가벼운 장난을 친 것뿐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자, 다시 해보자. 처음 보는 남자가 모형 비행기를 줬고, 넌 나한테 혼날까봐 친구집에 숨겼어. 그 남자를 두 번째로 본 건 오늘 집 앞에서야. 엄마 불러내라고 윽박지르면서 널 때리 고 있을 때 아버지가 온 거다. 알았지? 넌 그거 외엔 아무 것 도 몰라. 누가 물어도 그렇게 대답해야 해. 나머지는 엄마가 알아서 할테니까... 알았지? 알았지? 그날 밤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한 한준에게 전후사정을 전해들은 어머니는 주위를 살피 며 소리죽여 당부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정부가 남편을 살해 한 것이라고 진술했다. 사내는 뭐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태 도로 시종일관 입을 다물고 있었다. 재판이 진행되어 가면서 어머니를 둘러싼 소문은 차마 들어줄 수가 없을 정도였다. 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