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비-실 버 엔 젤 유난히 푸르렀던 여름의 하늘. 푸르른 녹음이 우거져있던 숲속에서 ... 은빛천사를 보았다. 금방 하늘나라에서 내려온것 같던 천사 ... 은빛천사가 내마음에 날아들었다 .... "어떤가? 여름방학동안 하기에는 멋진 일자리네. 이만한 일자리 없어." 백발이 희끗희끗한 교수가 제안하는 일자리를 들은 윤주는 꽤나 진지한 표정이었다. 이제 갓 스무살의 대학생 정윤주. 대학생이 되고나서 맞는 첫번째 방학이었다. 친구들과 여행이니 뭐니 해보고 싶은건 산더미 였지만 윤주에게 그런것들은 애시당초 먼나라 이야기나 마찬가지였다. 동생이 셋이나 되는 빠듯한 중산층인 집안에 대학학비를 달라고 요구 할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어떻게든 자신의 학비며 용돈은 스스로가 알아서 해야하는 윤주였다. 그래서 이번 여름방학은 윤주에게 있어서는 돈벌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고 그래서 교수에게 일자리를 알아보게 된것이었다. "어허, 정윤주! 이런 기회가 흔한게 아냐. 그냥 자네는 휴가나 즐기면서 별장에 머물면 되는거 아닌가. 유림이 녀석 공부나 틈틈히 좀 봐주고. 놀며하는 일이야. 더구나 두달 아르바이트에 오백이나 주는데가 어디 있겠는가?" 교수에 말에 윤주는 곤혹스런 표정이었다. 평서부터 자신을 좋게 봐주던 사람좋은 노교수가 특별히 추천하는 일자리였다. 더구나 보수도 엄청나다. 단지 걸리는게 있다면 두달동안 꼼짝없이 강원도 별장에서 생활해야 한다는것이었지만 교수의 말대로 그냥 휴가를 즐긴다고 생각해버리면 그것또한 그리 큰 문제가 될것같지는 않았다. "교수님, 그런데 왜 강원도 별장에서 과외를 해요? 그것도 대학생 과외선생한테 오백씩이나 준다니. 그 강유림이란 학생이 대단한 학생인가봐요?" "내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는 강대사네 외동아들 녀석이네. 강대사는 직업이 대사다 보니 해외로만 근무를 다니고 또 유림이녀석 친엄마는 유림이 어릴때 돌아가셔서... 지금 새엄마가 있긴 하지만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 친자식이 아니니 아무래도 사랑은 못주는가 보더군. 그 새엄마는 강대사 따라 해외로 같이 나가고 지금 한국에는 유림이 혼자 있는셈이지." "와...대사요? 대단하다. 그런데 ... 왜 아들은 혼자 한국에 두고 떠나요? 그것도 외아들을." "유림이가 몸이 안좋아. 그래서 해외로 데리고 다닐만한 사정이 못되지. 유림이는 학교도 휴학하고 한 이년전쯤부터 그 별장에서 살고있어. 그래도 걔가 영특해서 얼마나 똑똑한지 가르치기도 쉬울걸. 어때, 자네가 하겠나?"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대며 뭔가를 생각해보던 윤주가 베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스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정도로 어려보이는 동안이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과 긴 생머리가 아직도 여고생같이 풋풋하게만 느껴졌다. "네, 제가 해볼게요. 언제 출발하면되죠?" "언니 좋겠다~ 이 더운데 우아하게 강원도 별장에 휴가간다니!" 이제 중학생인 윤주의 동생 희주는 언니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부럽다며 연신 윤주의 속을 뒤집어놓고 있었다. 자식이 넷이나 되는 윤주네 집은 한시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첫째인 윤주는 이제 대학생. 둘째인 희주가 이제 중학생. 그아래로 두 동생은 아직도 초등학생 이었다. 시끌벅쩍한 분위기 속에서 짐을 챙긴 윤주는 트렁크에 옷을 꽉꽉 눌러담고는 신경질적으로 트렁크 뚜껑을 쾅 닫아버렸다. "부럽냐? 부러워? 퍽이나 부럽겠다. 이 좋은 여름방학에 놀지도 못하고 돈벌러 가는게 어디가 부럽냐? 잘봐둬. 너도 나중에 내꼴날테니까." 희주의 머리를 한대 가볍게 쥐어박은 윤주는 입을 씰룩거리는 희주를 뒤로하고는 화장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헐렁한 반바지에다가 셔츠 한장을 받쳐입고 캡모자를 눌러쓴 모습이 영락없는 고등학생같았다. 자신의 모습이 꽤 만족스러운듯 피식 웃은 윤주는 침대위에 놓인 트렁크를 들고 방을 나섰다. "엄마, 아빠! 나 출발한다!!!" 거실에 나온 윤주가 꽥꽥 소리를 질러대자 안방에서 인상좋은 윤주의 부모님이 걸어나왔다. 놀지도 못하고 학비벌로 가는 딸이 안쓰러운듯 미안한 눈빛으로 윤주를 바라보는 부모의 심정을 모를리 없는 윤주는 씩씩하게 웃어주었다. "에이, 뭘 그렇게 쳐다봐. 좋지뭐. 이 더운데 난 강원도 별장에 딱 가서 멋지게 지낼텐데. 헤헷..혼자 가려니 이거 미안하다." "얘는...엄마가 정말 미안해 죽겠다. 우리딸 학비도 제대로 못줘서. 그래, 가서 너무 무리하지 말고 쉬기도 하고 그러면서 다녀와. 전화도 자주하고. 알았지?" "그래, 우리 윤주. 아빠도 우리딸 전화 기다리고 있으마." "언니! 잘다녀와- 올때 우리 선물도 사와야돼!"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 인우는 큰누나가 마치 어디 관광이라도 가는듯 선물까지 사오라고 말하고 있었다. 막내의 그 깜찍한말에 거실에 모인 가족은 한바탕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다섯명의 식구들에게 한마디씩 인삿말을 건네받은 윤주는 양손에 하나씩 트렁크를 들고서는 씩씩하게 대문을 빠져나왔다. 골목을 빠져나갈때까지 자신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는 동생들에게 환하게 웃어준 윤주는 큰길로 나오자 마자 택시를 한대 잡아탔다. 버스를 타고 역까지 가볼 생각이었지만 더운 날씨에다가 트렁크가 워낙에 무거워 어쩔수 없는게 안타까운 윤주였다. 한참 낮시간이라 별로 밀리지 않고 택시가 서울역에 도착하자 그 특유의 씩씩한 발걸음으로 역안으로 들어섰다. "강릉가는 기차표 한장요." 강릉가는 기차표를 끊어서 손에든 윤주는 나즈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정말 강원도로 떠나는 일만 남은것이다. 한때 꿈꿔봤던 여름날의 MT며 미팅이며 그런건 다 물건너가 버렸다.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캡모자를 벗은 윤주는 서둘러 기차에 몸을 실었다. SILVER ANGEL - 메인테마 작가 : 그린비 작가메일 : [email protected] 퍼가시기전 작가에게 허락필수! ▶불펌 금지. 팬픽으로 성형 절대금지◀ -------------------------------------------------------------------------------- 강릉역에 내린 윤주의 얼굴에는 조금전까지 가득했던 불만스러움은 온데간데 없고 온통 환한 미소로 가득했다. 강원도 촌구석이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상상이 완전히 틀렸다는걸 깨달았다. 너무도 아름다운 녹음이 펼쳐진 곳이었다. 공기부터가 서울의 탁한 공기와는 틀린것 같은 느낌이 대번에 느껴져왔다. "와우, 이거 멋진데. 이정도면 지낼만도 하겠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강릉역 안으로 들어선 윤주는 트렁크를 잠시 땅에 내려두고 호주머니에 꼬깃꼬깃 접어서 넣어두었던 쪽지를 펴보았다. 교수가 가르쳐준 별장 위치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였다. 강릉은 처음인데다가 사람이 드문곳에 위치한 별장을 찾아간다는게 윤주에게는애시당초 무리였다. 어쩔까 고민하던 윤주는 핸드폰을 꺼내고는 쪽지에 적힌 번호를 꾹꾹 눌렀다. 몇번의 신호음끝에 핸드폰 너머로 중년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여보세요?] "아..안녕하세요. 전 과외선생님으로 별장에 가게 되있는 정윤주라고 합니다." [아! 과외선생님요. 저희도 전해들었어요. 오늘 오신다고 하시더니 지금 어디세요?] "지금 여기 강릉역인데 아무래도 저혼자는 찾아가기가 힘들것 같아서요. 죄송하지만 별장 위치좀 상세하게 가르쳐 주실래요?" [처음 오신분이면 찾기 힘들거에요. 음...보자...아! 제가 강릉역으로 사람을 보낼께요. 한 30분쯤 뒤면 그쪽으로 사람이 갈꺼에요. 서울 가 4580 차가 오면 그걸 타고 오세요.] "감사합니다. 조금있다 뵈요." 기사까지 보내주겠다는건가? 이정도면 꽤 대우도 괜찮은걸. 뿌듯한 마음에 쿡쿡 웃음을 터트린 윤주는 대합실 의자에 다리를 쭉 뻗고 앉아서 역안을 훝어보았다. 몇몇의 오가는 사람을 제외하고는 정말 한적했다. 아직 본격적인 여행철이 시작되려면 조금 이른감이 있는 때이고 더구나 평일이라 더 한산한것 같았다. 그렇게 한 30분쯤을 앉아 기다리자 한 남자가 바쁘게 역안으로 뛰어들어와 누군가를 찾는듯 두리번 거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눈에도 저 남자라 자신을 데리러 온 사람임을 알수있을것 같았다. "여기요! 여기에요." 윤주가 손을 번쩍 들며 소리치자 처음에는 의아한 표정을 짓던 남자도 윤주가 누군지 알아차렸는지 인자하게 웃으며 윤주쪽으로 걸어왔다. 인상이 퍽이나 좋은 중년남자였다. "아이고, 정윤주 선생님이시죠? 제가 늦진 않았는지..." "아니에요, 늦기는요. 딱 30분만에 도착하셨는걸요. 데리러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게 제 일인데 감사는요. 얼른 가십시다. 이건 제가 들어드릴께요." 남자는 대합실 의자위에 놓인 윤주의 트렁크를 번쩍 들고는 종종 걸음으로 역을 빠져나갔다. 잠시 멍하게 그남자를 쳐다보던 윤주도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그의 뒤를 따라 차에 올랐다. 윤주의 짐을 뒷좌석에 밀어넣은 그는 신나게 차를 몰았다. 뭐가 그리 흥겨운지 그는 콧노래까지 흥얼거리고 있었다. "좋은일 있으세요?" "네? 아.. 좋은일은요. 그냥 기분이 참 좋습니다. 오랜만에 우리 유림도련님 선생님으로 젊은분이 오셔서 좋네요. 우리 도련님 이제 덜심심하시겠어요." 우리 도련님이라는 그의 말에 어딘가 따스함이 묻어있는것 같았다. 젊은 선생님이 왔다고 이렇게 기뻐하는걸 보면 그동안 나이든 선생님들만 왔었나봐? 대수롭지 않게 그의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웃어준 윤주는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았다. 서울에서는 볼수없는 풍경들이 시야에 들어오고 있었다. 푸른 산의 모습과 여유롭게 하늘에 걸려있는 정말 새하얀 구름. "와- 여기 정말 대단해요. 지금쯤 서울은 정말 북적댈텐데 여긴 다른 세계 같네요." "그렇죠? 여기서 한 한달만 살면 서울가기 싫어지더라구요. 여기가 훨씬 사람사는 맛이 느껴지는데 아니겠습니까." 별장에 도착할때까지 윤주는 그렇게 기사와 한참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의 이름은 김승현이라고 했다. 원래는 강대사의 전용기사 였는데 그가 해외파견을 나가며 자신은 한국에 남아 유림을 돌보고 있다고 말하는 그는 한눈에 봐도 참 순박하고 정많은 사람이었다. 별장으로 들어서는 길은 포장되지 않은 흙길이었다. 흙먼지를 풀풀 날리며 자동차가 산길을 한 10분쯤 달리고 나서야 푸르른 나무들 사이로 동화속에나 나올법한 예쁜 별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흔히들 말하는 전원주택풍으로 지어진 별장이었는데 그보다 훨씬 아기자기하고 예쁜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별장을 둘러싼 풍경또한 일품이었다. "정말 예뻐요! 전 이런집은 영화에나 나오는 집인줄 알았어요." 김기사를 따라 별장으로 들어서면서도 윤주의 입에서는 쉴세없는 감탄사와 칭찬의 말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겉도 멋졌지만 별장안은 더더욱 윤주를 경악하게 만들었다. 온통 원목으로 장식된 실내는 따뜻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이 둥근 모양으로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나있었고 널찍한 거실의 한쪽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는 통유리 창문 너머로 숲속의 모습이 한눈에 펼쳐지고 있었다. "아이고, 선생님 오셨네요." 인기척이 들려오자 주방에서 뭔가를 하고있던 여자라 반갑게 거실로 달려나와 윤주의 손을 덥썩 잡고 연신 웃어만대고 있었다. 어리둥절한 윤주는 대충 그녀에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창문에서 눈을떼지 못하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아까 전화받으셨던 분...맞으시죠?" "제목소릴 기억하시네요. 전 도련님 돌보고 있는 박은숙이라고해요. 그냥 편하게 불러주시면 된답니다." "아..네. 저...그럼 강유림군은 어디있죠?" "유림도련님요? 산책 나가셔서 아직 안오셨는데...아마 한 일이십분 내로는 들어오실꺼에요. 여기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세요. 제가 시원한 아이스티 한잔 타드릴테니." 윤주를 거실 쇼파에 앉힌 그녀는 조금은 호들갑 스럽게 다시 주방으로 달려가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내며 뭔가를 열심히 만들기 시작했다. 멀뚱하게 쇼파에 앉은 윤주는 테이블이며 티비며 그런것들을 쳐다보다가 시선을 창밖으로 옮겼다. 아무리 봐도 너무 마음에 드는 창이었다. 마치 숲속을 그려놓은 한폭의 그림으로 벽면을 가득 채운듯한 느낌이 절로들었다. 마침 오후 6시쯤의 오후 햇볕이 내리쬘 시간이라 나무들 사이로 은은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런 풍경사이로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한사람의 인영이 흐릿하게 모습을 나타냈다. 아직 너무 멀어 자세히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사람이었다. 미간을 찌푸린 윤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 사람의 모습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사람이 윤주의 시야에 확실히 들어왔을때. 윤주는 심장이 덜컥하는 기분이었다. 새하얀 피부가 너무 인상적인 소년이었다. 유독 하얀 피부에 대조되는 까만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 실버엔젤 - 은빛천사 강유림 "이거 드시면서 기다리세요. 도련님이 올시간이 됬는데 ... 아! 저기 오시네요!" 테이블에 아이스티를 내려놓은 은숙은 유림이 별장문을 열고 들어서자 부리나케 유림에게로 달려가 마치 일곱살난 어린애를 다루는양 그를 대했다. 날씨가 덥지요부터 시작해서 이것저것 쉴세없이 말을 건네며 그녀는 유림을 윤주 앞으로 데리고 왔다. 역시나 창밖의 그 소년이 강유림이었다. 멀리서 봤을때와는 또 다른 느낌이었다. 윤주의 시선은 천천히 유림의 모습을 뜯어보고 있었다. 약간 길다는 느낌이 나는 새까만 머리칼과 그와는 참 대조되게 피부는 마치 새하얀 눈이 내린것같았다. 몸이 안좋다고 하더니 그래서 그럴까 ...? 어떻게 남자가 저렇게 흴수있을까? 속으로 무수히 감탄사를 내뱉으며 시선을 살짝 위로 올린 윤주의 눈에 유림의 손이 들어왔다. 저런걸 곱다고 하는것이리라. 정말이지 여자 손보다도 선이 더 고울것같은 유림의 새하얀 손에 윤주는 피식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상상했던것과는 참 다른 모습이었다. 강릉으로 오는 기차안에서 계속 강유림이 어떤 학생일지 그려보던 윤주였다. 윤주의 상상속에 강유림은 키는 훤칠하게 크고 미남형의 남자였다. 그러나 지금 눈앞에 서있는 그는 상상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앳되보이는 얼굴과 윤주보다 조금 더 클것같은 키. 그렇다고해서 여자같이 곱상하게 생긴 얼굴은 또 아니었다. 쌍꺼플없이 커다란 눈매와 날렵한 턱선은 남자같았지만 또 선홍빛의 입술은 여자같기도하고. "안녕? 네가 강유림이지? 난 방학동안 널 맡게될 정윤주라고해." 윤주가 활짝 웃으며 유림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유림은 고개를 약간 비스듬히 들고는 윤주를 찬찬히 살피고 있을뿐. 아무런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쪽...몇살이죠?" "응? 나? 난 올해 스무살. 유림이는 올해 열여덟이라고 들었어.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좋고 윤주누나라고 불러도 좋고. 유림이 편할대로 불러." "그러죠. 정윤주씨." '정윤주씨' 라는 극히 사무적이고 딱딱한 호칭에 윤주는 조금 얼굴을 찌푸리고는 유림을 향해 내밀었던 손을 다시 접었다. 첫눈에도 알수있었다. 유림은 그다지 윤주를 달가워하고 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서늘한 그의 눈빛이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다른이가 이런 태도를 취했다면 윤주는 분명 불쾌했을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그사람을 무시하고 돌아서 버렸을테지만 이상하게도 유림에게는 불쾌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의 목소리 때문일것이다. 한마디 한마디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글쎄 ... 색으로 표현하자면 한없이 맑은 물빛이라고 해야할까? 참 맑은 목소리였다. 그의 외모와도 닮아있는 목소리. 어리고 맑아보이는 얼굴과 마찬가지로 목소리또한 그랬다. "그래, 유림아. 난 그냥 유림이라고 부를께. 그래도 되지?" "마음대로. 그럼 전 이만." 윤주를 향해 고개를 살짝 목례를 한 유림은 돌아서서 천천히 이층계단을 올라가 자신의 방문을 세게 쾅 닫아버렸다. 멍하게 그런 유림을 올려다 보던 윤주는 머쓱해진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하고는 은숙을 향해 싱긋 웃어주었다. "유림이가 ... 절 별로 안좋아하나봐요." "아휴, 도련님도 참. 그게 아니라 .... 유림 도련님이 원래 사람을 좀 .. 가리시는 편이라. 선생님 불쾌하시진 않으시죠? 원래는 참 착한 분인데 ... 친한사람한테는 저런분이 아니에요. 이해해주세요." 워낙에 미안해 하는 그녀의 태도에 윤주는 괜찮다며 몇번이나 그녀를 향해 웃어주었다. 실제로 그렇게 불쾌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두달동안 함께 지내야할 상대가 이처럼 마음에 든다는것이 말이다. 이런 맑은곳에서 오래살면 유림이 처럼 되는걸까? 산보다도 맑아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보다도 맑은 ... 천사의 목소리 같은 목소리를 가진 그사람. 도저히 싫지가 않았다. 사람을 대하는 그 사무적이고 딱딱한 태도가 조금 걸리긴 했지만. "선생님은 어떤방 쓰실래요? 여기 방에 여섯갠데 안쓰는방이 세개랍니다. 이층에 방 두개랑 일층방 하나가 있는데 마음에 드는 방으로 쓰세요." "음...유림이 옆방 비었나요?" "도련님 옆방요? 비어있긴 한데 ... 그방보다는 일층방이 더 넓고 전망도 나을텐데..." "아니에요. 일단 유림이랑 친해져야 될것같으니까 유림이 옆방으로 할게요. 전망이야 뭐 여기서 보이는 전망이 다 멋진걸요." 방문을 닫은 유림은 방문에 기대서서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 강릉 별장에서 지낸지도 벌써 삼년이 넘는 시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중학교를 휴학하고 이쪽으로 옮겨왔고 그 이후로는 학교에 나갈수도 없었다. 태어났을때부터 몸이 약하다는말을 듣고 자라고 또 잔병치례또한 많이 하며 자란 유림이었지만 본격적으로 몸이 나빠지기 시작한건 초등학교 3학년 부렵이었다. 한창 뛰어노느라 정신없을 그무렵에 유림에게 '대동맥판막증' 이란 듣기에도 생소했던 병이 찾아왔다. 호흡이 곤란해져오고 가끔씩 열살짜리 어린애가 견디기에는 죽을만큼 힘겹기도 한 고통이 뒤따르는 끔찍한 병앞에 열살짜리 꼬마 강유림은 꼼짝할수 없이 당할수 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그에 관한 합병증 으로 '심장천식' 이라는 병까지 같이 오고 나서는 유림으로써는 학교 마저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유림에게는 어렸을적 기억 하면 제일먼저 떠오르는게 병원이었다. 다른 아이들이 공을 차며 즐겁게 뛰어놀 시간에 유림은 항상 새하얀 병원벽을 마주하고 있어야만 했다. 그런 과정에서 엄마를 잃고 철저하게 외롭게 자란 유림이었다. 아버지가 있긴 했지만 항상 일로 바쁜 그였고 가정적인것과는 거리가 먼 강대사와는 가족다운 말도 몇마디 나눈적이 없었고 강대사는 다른 여자와 재혼한 이후로는 유림에게 큰 관심을 두지않고 있었다. 그런 유림에게 가족이라고는 어린 유림을 쭉 돌봐온 유모 은숙과 김기사밖에는 없었다. 중학교 2학년때 병의 악화로 학교를 휴학하고 이 강원도 별장으로 내려온이후. 강대사는 꼬박꼬박 많은 액수의 생활비와 가정교사를 보내오고 있었다. 그러나 유림에게 그런것은 조금도 달갑지 않았다. 형식뿐인 가족. 일년에 한두번 볼까말까한 아버지라는 존재는 유림에게는 다가서기 힘들고 딱딱한 존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가정교사' 란것도 전혀 반갑지가 않았다. 그냥 건성으로 대충대강 유림과 몇달을 때우고는 더이상은 별볼일 없다는듯 훌쩍 떠나가곤 하는 사람들 이었다. 그들이 원하는건 강대사가 지급하는 어마어마한 액수의 과외비였지 유림이 아니었다. 그런 아주 형식적인 만남. 잠시 스쳐지나가고 나면 외로움만 더 커지는 그런 사람들의 방문이 이제는 아주 지긋지긋했다. 더구나 이번에 보낸 여자는 겨우 스물밖에 되지 않은 대학생이라니. 안봐도 뻔한일이었다. 머리칼을 쓸어넘긴 유림은 긴 한숨을 내쉬고 침대에 털썩 누워서 눈을 감았다. 귓가에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가 기분좋게 들려왔다. 유월중순의 더운 날씨에도 이곳은 그렇게 덥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곳이었다. 시원하게 불어오는 여름바람에 상쾌함까지 느껴지는 그런 오후였다. 유림은 더이상 새로운 가정교사에게는 신경을 쓰지 않으려는듯 잠시 표정을 찌푸렸다가 곧 얼굴을 베게에 파묻고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오후의 햇살이 잠든 유림의 위로 부숴져 내리고 있었다. ============================================ ▷◁ 대구지하철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 실버엔젤 - 산들바람같은... 유림의 방옆에 있는 자그마한 방안에 들어선 윤주의 입에서 나즈막한 탄성이 터져나왔다. 항상 동생들과 북적거리는 한방을 써온 윤주에게는 혼자서 방을 쓸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나는 일이었는데 이방은 윤주의 마음에 쏙 들었다. 유럽풍으로 난 창문너머로 나무들이 우거진 모습이 보이고 방안은 전체적으로 밝은 파스텔톤으로 꾸며져 있었다. 윤주에게는 스위트룸보다 더 좋게만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싱글벙글 연신 웃어대며 윤주는 트렁크에서 이것저것 짐들을 꺼내 정리해나가기 시작했고 은숙은 그런 윤주를 갸우뚱한 표정으로 바라보고만 있었다. 지금까지의 선생님들과는 확연하게 틀린 아가씨였다. 나이부터가 그랬다. 여지껏 과외선생님은 이십대 후반. 또는 삼십대 초반의 어른들이 오곤 했었는데 이번에는 갓 대학을 입학한 신입생 선생님이다. 더구나 어떻게 보면 유림보다도 더 어려보이기도한. "이방이 좋으세요? 지금까지 선생님들은 다들 일층방을 쓰시던데..." "일층방요? 거긴 너무 커서 혼자쓰기는 썰렁해요. 여기가 딱 좋은데요? 좁다고 해봐야 제방보다 훨씬 넓어요. 더구나 혼자 쓸수도 있구요." 혼자서 콧노래까지 흥얼거리며 짐정리를 마친 윤주는 기지개를 한번 크게 펴고는 창밖으로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주위를 살펴보았다. 온통 초록으로 뒤덮인 풍경이 마음속까지 맑게 정화시켜줄듯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다. 정말이지 다른나라에 온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풋, 이거 엄마랑 아빠한테 정말 미안해 지는데? 나만 좋은데서 여름을 보내게 생겼으니.. 윤주는 아랫층에서 식사하라는 고함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 그렇게 창밖만을 내다보고 있었다. 식사시간을 알리는 고함소리에 윤주는 간편하게 옷을 갈아입고는 후다닥 아랫층에 있는 식당으로 달려 들어갔다. 식탁에는 유림과 은숙. 그리고 김기사 세명이 윤주를 기다리고 앉아있었다. "죄송합니다~ 이거 제가 제일 늦어버렸네요." 쑥스럽게 웃은 윤주는 유림의 앞쪽인 자신의 의자에 앉아 식탁을 내려다보았다. 잔뜩 배가고픈 윤주앞에 차려진 밥상에는 야채 샐러드와 간단한 몇가지 음식만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그러나 처음받는 밥상에서 반찬 투정을 할수도 없는 상황이라 윤주는 그냥 아무렇지 않게 수저를 들었다. 식사하는 동안에도 유림은 한번도 고개를 들지 않고 묵묵히 자기 밥그릇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말한마디도 없이 조용히 식사만 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식사를 맛있게 하는것도 아니었다. 밥알을 세는듯 밥그릇을 몇번 깨작거려본 유림은 야채샐러드에 몇번 손을 댔다가 수저를 탁 놔버렸다. "유림아, 그거 먹고 되니? 더먹지." 불쑥 꺼낸 윤주의 그 한마디에 세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윤주쪽으로 쏠렸다. 머쓱한 윤주는 괜히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살짝 유림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놀라는 표정을 짓던 유림은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원래 이렇게 먹어요. 그럼 이만 일어날께요." 유림이 싸늘한 태도로 식탁에서 일어서서 자신의 방으로 올라가 버리고 나자 윤주의 얼굴이 시무룩하게 변해 있었다. 딴에는 친해져 보려고 건넨말에 유림이 냉담하게 반응하자 여간 서운하고 속상한게 아니었다. 이정도면 따뜻하게 말해줄법도 하건만 유림은 윤주를 똑바로 쳐다봐 주지도 않고 있었다. "저...선생님.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도련님이 원래 식사는 저렇게 밖에 안하세요." 매끼니마다 저렇게 먹고 산다고? 윤주는 거의 경악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유림이 왜저렇게 말랐는지 대충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원래 몸이 좋지 않은데다 식사도 이정도로 밖에 안하니 저럴수 밖에. "괜찮아요~ 제가 뭐 초면부터 너무 많은걸 간섭했나보네요. 그럼 저도 이만 일어날게요." 유림의 뒤를 따라 식탁에서 일어난 윤주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라갔다. 이대로 몇달을 지낼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어쨌건 두달간 윤주는 유림의 과외선생님으로 이곳에 온것이었고 그 임무를 다하자면 일단 유림과 친해지는게 급선무였다. 유림의 방문앞에서 숨을 가다듬은 윤주는 가볍게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유림의 대답이 들려오지 않자 윤주는 입술을 꼭 깨물고는 유림의 방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창가에 있는 의자에 앉아 밤하늘을 내다보고 있던 유림은 갑작스레 들이닥친 윤주의 모습에 화들짝 놀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왜 함부로 들어와요?" "노크했는데 대답이 없길래. 일단 허락도 없이 들어온건 내가 미안. 근데 있지 우리 잠깐만 얘기하면 안될까? 나 너한테 할말도 있고 그런데." 참 넉살도 좋은 여자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허락도 없이 남의 방에 들어닥치고서는 싱글싱글 웃어가며 말을 걸어온다는것이. 유림은 할수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창가에 놓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빤히 윤주를 올려다 보았다. 어디 할말있으면 해보라는듯한 태도의 유림의 모습에 윤주는 피식 웃고는 유림의 맞은편인 유림의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먼저 할말은 ... 우리 수업이야기야. 일단은 내가 너한테 수학이랑 영어를 가르칠거거든. 그러니까 수업은 음 ... 언제가 좋을까?" "좋을대로." 짧막한 대답에 윤주는 울컥하는 기분이었지만 그래도 미소를 잃지않고 밝은 표정으로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응? 그래..그럼 수업은 낮에는 더우니까 하지말구 저녁먹고 이시간대에 하자. 정확하게는 8시부터 10시까지. 너무 긴가? 아니다, 이정도는 되야 뭘 공부하지. 뭐 혹시 열시부터 자거나 하는건 아니지? 시간 괜찮지?"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유림이 피식 웃음을 터트려버렸다. 유림이 한마디를 하면 윤주는 열마디 스무마디를 늘어놓고 있었다. 더구나 가르친다는 그말에 유림은 웃지 않을수가 없었다. 지겹도록 찾아와대는 가정교사들과 삼년을 넘게 보낸 유림이었다. 그런 유림은 이미 보통 고등학생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고 수학이나 영어쪽에서는 윤주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모자랄 실력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저토록 당당하게 자신을 가르치겠다는 윤주의 태도에 웃어버리고 만것이었다. 그런 의미를 알리 없는 윤주는 일단은 유림이 웃자 자신도 덩달아 웃어버렸다. "그래. 그럼 수업은 그때하고 우선 기본실력부터 알아야 하니까 내일은 기본 테스트부터 해보자. 우리 내기하나 할까? 기본테스트해서 네가 80점 이상 받으면 내가 유림이 네가 원하는걸 하나 들어주고 80점이 안되면 유림이가 내부탁하나 들어주기로." 윤주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꺼냈다. 어려운 문제들을 잔뜩 내서 유림이 도저히 80점을 못맞게 만들어 놓고 유림에게 자신을 '윤주누나'라고 부르라고 시킬 예정이었다. 그 제안에 유림은 잠시 윤주를 똑바로 쳐다보다가 희미하게 입가에 미소를 걸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유림의 눈에 윤주는 도저히 대학생같아 보이지가 않았다. 말투나 행동 같은게 자신보다도 어린 아직 소녀티를 벗어내지 못한 십대 철부지 같아 보였다. 그리고 방긋방긋 잘 웃어대는게 어린아기 같기도했다. 쉽게 말하자면 '선생님'의 느낌보다는 차라리 '동생'의 느낌이 더 크게 와닿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웃음과 밝은 행동들이 마치 산들바람같았다. 더운여름날 불어오는 시원한 한줄기의 산들바람. ============================================ ▷◁ 대구지하철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 실버엔젤 - Green House -------------------------------------------------------------------------------- The Silver Angel theme for yu-rim : Meditation 작가 : 그린비 작가메일 : [email protected] 퍼가실때는 작가 메일로 연락주세요- ▶불펌 금지. 팬픽으로 성형 절대금지◀ -------------------------------------------------------------------------------- 놀라 입을 떡하니 벌린 윤주는 도저히 믿을수 없는지 유림의 시험지를 보고 또보며 고개를 갸우뚱 거리고 있었다. 계획했던대로 어려운 문제만 고르고 골라서 만든 테스트지를 유림에게 당당하게 내밀었건만 유림은 불과 이십분만에 모든 문제를 다 풀고는 윤주에게 시험지를 내밀었다. 적어도 한시간은 끙끙대야 반이라도 풀것이라 예상했던 윤주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시험지를 받아들고 시큰둥한 태도로 매겨나가기 시작 했지만 시험지를 다 매기고 나서는 경악스런 표정이 되버렸다. 세상에 ... 이건 있을수도 없는일이야! 내가 얼마나 고민해서 낸 문젠데..세상에나.. 백점이라니. 미쳤어 ... 미쳤어 정윤주! 이건 꿈이야! 단 한문제도 틀리지 않고 다맞은 시험지. 유림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의자에 앉아 윤주를 쳐다보고 있었다. 윤주는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으며 유림을 향해 억지 미소를 지어보였다. "하..하하...유림이 공부 ..되게 잘하는구나. 기본실력이 .. 장난이 아닌데. 뭐..약속은 약속이지. 내가 유림이 부탁하나 들어줄께." "정말 뭐든지 들어줘요?" 그물음에 잠시 움찔한 윤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건 자신이 해버린 약속이니 이제와서 내뺄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할수 있는거라면 들어주지." "그럼 이걸로 해요. 수업하는것 이외에 나한테 관심 끊어요. 어차피 여기 돈벌로 온거잖아요. 수업만 하면 되는거니까 그 외에는 서로 얼굴 볼일 없으면 좋겠네요." 유림의 앞에서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물러나온 윤주는 괜한 방문에게 화풀이를 하는듯 세게 방문을 닫고 방에 들어와서는 한참을 씩씩거리며 방안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세상에 .. 건방져도 건방져도 저렇게까지 건방진 녀석이 세상에 있다니! 첫인상부터 뭔가 차갑고 냉철해 보이기는 했지만 유림이 이정도일줄은 몰랐었다. 수업이외에 관여되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니. 그건 내가 싫단말이야? 자존심이 푹 푹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것 같았다. 뾰루퉁한 표정의 윤주는 이리저리 방안을 돌아다니다가 결국은 그냥 침대에 주저앉아 버렸다. 어떻게 유림에게 다가서볼 뾰족한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저렇게 다가오지 말라고 잔뜩 방어를 하는 녀석에게 무슨수로 다가간단 말인가? 고요한 숲속에 위치한 별장이라 방안은 윤주의 새근새근한 숨소리와 시계바늘이 움직이는 소리. 그리고 풀벌레 소리로 가득차 있었다. 고요함 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고 있는 윤주의 귓가에 음악선율이 들려왔다. 유림의 방에서 들려오는듯한 그 음색에 윤주는 침대에서 살짝 일어나 들려오는 음악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았다. 직접 연주하고 있는듯한 청명한 피아노 음색이었다. 이제서야 비로소 유림의 방 한쪽구석에 있던 피아노 한대가 떠올랐다. 그럼 이건 강유림이 연주하는소리? 의외네. 그녀석이 피아노도 칠줄안다니. 곡명은 알지 못하지만 어디선가 많이 들어보던 선율이었다. 어딘가 슬픈듯 하면서도 맑고 또 맑은듯 하면서도 애달픔을 담고있는 음색이 유림을 닮아있는 곡이었다. 초여름의 밤. 조금은 무덥던 그날에 윤주는 그렇게 한참을 유림의 피아노 곡소리에 취해있었다. "유림아, 좋은아침!" 잠에서 깬채 부스스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오던 유림은 언제 일어났는지 벌써 말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건네는 윤주의 모습에 흠칫 놀라며 조금은 못마땅한 시선으로 윤주를 쳐다보았다. 윤주가 이곳 별장에 온지도 벌써 일주일째. 지난 일주일동안 조용하던 별장은 윤주 덕택에 꽤나 시끄러워져 있었다. 은숙과 이런저런 수다를 떨며 잠시도 조용히 있지를 않고 시간만 나면 유림만 보면 졸졸 따라 다니며 말을 건내는 윤주 덕택에 유림은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기억이 나질 않았다. "뭘 이렇게 일찍 일어나요? 더 잘줄알았는데." "일찍이라니, 벌써 8시가 넘었는데. 이때쯤이면 딱 일어나 줘야지. 오늘 날씨 되게 좋아. 그치?" "그런것 같네요." 시큰둥한 유림의 대답에 윤주는 잠시 시무룩한 표정을 짓다가 다시 용기를 낸듯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아줌마가 그러시던데 유림이 너 산책나가는거 좋아한다며?" "그런데요." "그럼 나랑같이 산책나갈래? 오늘 날씨가 산책하기 딱 좋은날씨잖아." 도대체 이 여자는 자존심이 없는걸까 아니면 성격이 너무 좋아고 해야하는걸까. 일주일째 철저하게 무시당하고 있는데도 기세가 꺾이기는 커녕 날이 갈수록 더 씩씩해져만 가고 있었다. 당장에 싫다는 대답을 내뱉으려던 유림은 입을 다시 다물고 천천히 윤주를 살펴보았다. 지금까지 자세히 쳐다본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뭐 꽤나 예쁘장하게 생긴 얼굴이었다. 어깨보다 살짝 더 아래로 내려오는 생머리와 살짝 속쌍꺼플 진 시원스럽게 큰 눈매가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유림의 가슴을 두근거리게했다. "그럼 같이 가는거지? 우리 아침밥먹고 출발하자. 난 이산에 난 산책로는 하나도 모르니까 네가 소개해줘. 얼른 밥먹자." 유림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윤주는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다해버리고는 쪼르르 식당으로 달려가버렸다. 멍한 표정으로 그런 윤주의 뒷모습을 쳐다본 유림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참 여러모로 사람 귀찮게 만드는 여자였다. 과외를 하겠다고 나서는것 부터 시작해서 사생활 간섭에다가 이제는 마음대로 산책까지 결정해버려? 하지만 유림도 싫지만은 않았다. 휴학이후로 처음 만난 유림 나이 또래의 사람이 윤주였다. 심장병이라는 몹쓸 녀석 덕택에 친구하나 제대로 사겨보지 못한 유림은 친구는 필요없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 왔지만 그래도 가끔씩 드는 외로움을 감출수는 없었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여자친구 같은건 아예 생각도 해본적이 없는 유림이었다. 그런데 윤주의 환한 웃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 같고 말걸기도 쑥스러운 그런 느낌. 스스로 생각해도 웃긴 감정이었지만 윤주가 온 첫날부터 유림은 쭉 그랬다. 하지만 이 모든게 그동안 또래를 만나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유림은 생각하고 있었다. ============================================ ▷◁ 대구지하철 희생자를 추모합니다! #. 실버엔젤 - 산책 유림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나선 윤주는 연신 환호성을 질러대며 뭔가를 쫑알댔다. 유림은 자신이 왜 이런 안내를 도맡아야 하는지 스스로 생각해도 한심하다고 느꼈지만 별말없이 윤주에게 자신이 즐겨 찾는 산책로를 소개시켜주고 있었다. 여러개의 산책로 중에서도 유림이 특히 아끼는 오솔길이었다. 한두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조그마하고 구불구불한 길이었지만 경사도 거의 없고 평지에 가까운 길목이 심한 운동을 해서는 안되는 유림이 다니기에 적당한 코스였다. 더구나 그 길옆섶에 피어있는 여러 꽃들이나 나무들. 여름이면 시원스런 물소리를 내며 흘러가는 조그마한 시냇물같은건 유림이 무척이나 아끼는 모습들이었다. 사람이 북적거리는 도시와는 전혀 달라보이는. 마치 다른 세계에 와있는 착각까지 들게하고 있는 주변 풍경에 윤주는 가슴속 깊은곳까지 맑아지는 기분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고 또 서울에서 자란 윤주는 이런 한적산 산을 접할기회가 거의 없었다. 지리산이다 설악산이다 몇번 놀러다닌적은 있었지만 이 산에 비할게 아니었다. 알려지지 않은. 조그마하고 아기자기한 아름다움이 이산에는 깃들어 있었다. "와, 유림야! 대단하다. 이거 완전히 식물원이 따로없네. 별나무가 다있어." '유림아' 라는 말이 그렇게 정답게 들릴수가 없었다. 유림은 윤주의 뒷모습을 보며 아주 옅지만 따뜻하게 미소지어보았다. 삼년동안을 유모와 김기사. 두사람과만 지내왔다. 가정교사가 수없이 찾아오고 병원 의사들도 볼일이 꽤 있긴했지만 이렇게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은 없었다. 유모나 김기사는 항상 '도련님' 또는 '유림도련님'으로 자신을 불러주었고 가정교사들은 '유림군' 내지는 '유림학생' 으로 자신을 불러줬었다. 누군가가 이름을 불러준다는게 ... 이런 느낌일까? 내가 살아있음을 느낄수 있을것 같은 기분. 내이름이 다른사람에게 불려질때..저런 느낌이구나. 맑게 울리는것 같은 느낌이 ... 드는구나. 산책로를 한바퀴 빙 도는동안 윤주는 이꽃 저꽃을 들여다보며 향기도 맡아보고 꽃이름이 뭔지 또는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를 유림에게 귀찮을 정도로 물어댔다. 유림은 간간히 짜증서러운 표정을 짓기도 했지만 나름대로는 친절하게 설명까지 덧붙여서 설명해주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읇는다고 했다. 산속에서만 근 삼년을 살다보니 유림은 저절로 식물이름에는 도가 터있었다. 더구나 항상 다니는 길목에 핀 꽃이며 나무들이야 유림에게는 손바닥 들여다 보듯 훤한것들이었다. "유림이 너 진짜 똑똑하다. 내가 뭐 가르칠것도 없겠는데." 윤주가 건낸말에도 유림은 아무 대답없이 그냥 묵묵히 앞서 걸어가고 있었다. 말수가 꽤 적은. 아니 많이 적은편이었다. 가끔 건네는 말에나 대답해주고 그외에는 일체 말을 하지 않는 유림. 사람을 많이 대해보지 않아서일까 아니면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일까? "내가 어느학과 다닐것 같아? 그거 아직 모르지? 맞춰봐~" 윤주는 어떻게든 유림과 친해져 보려 부던히 노력중이었다. 태어나서 싫다는 사람 붙잡고 이렇게 많은 얘기를 건네본건 또 처음이었다. 질렸다는듯 윤주를 쳐다본 유림이 뭔가 생각해보는듯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의미를 알수없는 웃음을 입가에 씨익 머금었다. 웃을때 한쪽 입꼬리가 약간더 올라가게 미소짓는 유림의 표정이 꽤 마음에 들었다. 잘 웃지 않는 애지만...웃으면 저렇게 멋진데. 좀 자주 웃지. "유아교육학과." "...유아교육학과? 틀렸어~ 내가 어딜봐서 그렇게 보여? 내가 유치원 선생님하면 아마 아무도 나한테 애 안맡길껄. 쿡, 나한테 맡겨놔봐- 한달만에 애 엉망될거다. 난 영문학과다녀. 안어울리지만 뭐 어쨌든 난 영문학과생이라구." S대 영어영문학과라. 공부 꽤나 했나보네. 유림의 얼굴에 저절로 웃음이 피어올랐다. 윤주의 저런 분위기는 꽤 마음에 들었다. 처음 보는 사람도 친구 대하듯이 편안하게 대해줄수 있는 성격. 저런걸 흔히들 사교성이 좋다고 말하는거겠지? 그점 하나는 마음에 드는군. "유림아, 그럼 넌 꿈이뭐야? 너 공부 무지 잘하니까 꿈도 높을것 같은데." 그 질문에 유림은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누구도 유림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유모조차도. 심장병이라는 시한폭탄같은 병을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유림에게 '미래의 꿈' 이란걸 물어본다는걸 사람들은 다들 꺼려했고 그래서 어떻게든 그 질문은 피하려고 노력했다. 유림 자신도 물론 그랬다. 누군가가 그런걸 물어온다면 다른 이들처럼 흔쾌히 대답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가 싫어서 '꿈' 따위는 잊고살았다. 아니, 꿔보지도 않았다. 순간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여자가 누굴 놀리는건가? 하지만 윤주의 눈을 본 순간 그런 화는 누그러들어버렸다. 그 눈빛에는 유림을 놀려보겠다거나 조롱한다는 기색은 조금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 궁금해 하고 있는것 같다. 바보같은 여자군 ... 해야될말 해야되지 말아야 할말도 구분 못하는... "생각해본적 없어요. 그런거 저한테는 사치죠. 모르세요? 언제죽을지 모르는 병안고 사는 사람한테 그런건 사치고 욕심이에요." 윤주는 그제서야 아차 싶은지 굳은 표정으로 유림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유림은 이미 싸늘하게 굳은 표정이었고 윤주는 마냥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그래, 유림이는 환자였지. 심장병 환자... 하지만 왜 꿈을 꾸면 안되는걸까? 죽는다는 법은 없는거잖아. 살수도 있는거고 원하는걸 이룰수도 있는건데 ... 꿈이 사치고 욕심이라니. "왜 그게 사치야? 꿈꾸는데 돈드니? 그냥 한번쯤 생각해 볼수도 있잖아. 거창하게 큰게 아니라도 뭐 작은거라도 말야. 지금 내 꿈은 너랑 친하게 지내보는 거거든. 더 크게 보자면 음... 나는 동시통역사가 되고 싶고 빨리 아기 엄마가 되고싶고. 이런게 다 꿈이지뭐 별다른건가." "그쪽이랑 나랑은 다르죠. 그쪽은 ... 잠들기 전에 내일아침에 일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 해본적 있어요? 오늘밤이 마지막이 아닐까. 이런생각. 해본적 없죠? 그렇다면 당신은 몰라요. 그게 어떤 마음인지. 그런 마음가지고 꿈을 가진다는게 얼마나 미친짓인지." 어떻게든 친해져보려 건넨말이었는데 유림은 정말 불쾌한지 표정을 냉철하게 굳히고는 윤주를 스쳐지나 조금 빠른 걸음으로 성큼성큼 왔던길을 되돌아가 버렸다. 유림을 뒤따라 가려던 윤주는 그냥 걸음을 멈추고 유림의 모습이 숲속에서 사라질때까지 그자리에 멍하니 서있기만 했다. 아무래도 오늘은 큰 실수를 해버린것 같았다. 유모가 유림에게는 말조심할게 많다고 그렇게 당부를 했는데 그걸 깜빡해버리다니. 하지만 유림의 말이 뇌리속에 박혀서 떠나질 않았다. 그럼 유림아 ... 넌 잠들기 전에 그런 생각을 하고 잠드는거니? 내일아침에 ... 눈뜰수 있을까? 내가 내일까지 ... 살수있을까... 그런 생각으로 하루를 마감하고 아침에 눈을 뜨면 일단 살아있구나 라는것에 안도하고 ...밤이면 또 불안해하고. 그렇게 ... 살고있는거니? 가슴이 알싸해져왔다. 아직 어린 유림이었다. 윤주 자신도 겨우 스물밖에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지만 유림은 그런 윤주보다도 두살이나 어린. 겨우 열여덟의 한창나이인 소년이었다. 그런 유림이 그런 생각을 하고 산다니. 그런 두려움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니. 애달픈 시선으로 유림이 사라져간 곳을 바라보고 서있던 윤주는 그렇게 한 십분쯤을 숲속에 우두커니 서있다가 터덜터덜 별장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실버엔젤 - 별가루가 쏟아지던 밤 -------------------------------------------------------------------------------- The Silver Angel theme for love 작가 : 그린비 작가메일 : [email protected] 퍼가실때는 작가 메일로 연락주세요- ▶불펌 금지. 팬픽으로 성형 절대금지◀ -------------------------------------------------------------------------------- 맑은 공기 ... 그리고 맑은 물. 아름다운 것만 잔뜩 있는 산에서 살면 다들 그렇게 맑아지는 걸까요 ? 강유림이란 사람은요 너무 맑아요. 너무 투명하고 맑은 사람이라서 다가가기가 무서울정도로. 유림이는요 금방이라도 날개가 돋아나서 하늘을 훨훨 날아가버릴것 같은...은빛 천사에요. '똑똑-' 윤주의 조심스러운 노크소리에도 유림은 아무대답도 하질 않았다. 문앞에서 몇분쯤을 서성거리던 윤주는 더이상은 못기다리겠는지 빼꼼히 문을 열고 유림의 방안을 들여다 보았다. 벌써 해가 져서 깜깜해진 밤이었는데 유림의 방에는 불조차 켜져있지 않았다. "유림아, 수업해야지." 유림을 부르며 방안에 들어선 윤주의 눈이 어둠에 익숙해졌을 무렵. 침대에 누워있는 유림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천천히 침대옆으로 다가간 윤주는 힐끔 유림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은빛으로 쏟아져 내리는 달빛을 받아서일까. 하얀 유림의 피부가 더 하얗게 빛나고 있는것만 같았다. 사람이 들어와도 모르고 새근새근 잠든 모습이 차갑고 냉정한 유림의 태도와는 거리가 멀어보였다. 피식 웃은 윤주는 들고 들어온 교재를 탁자위에 얻어두고 유림의 침대 옆에 있는 스탠드에 불을 켰다. 은은한 오렌지빛 조명이 방안을 밝히고 침대위에 잠든 유림의 모습이 똑똑히 눈에 들어왔다. 조금 헝클어진 머리칼과 긴 속눈썹에 윤주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고 유림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여자도 아닌 녀석이 ... 곱게도 생겼네. 속눈썹 긴거좀봐. 와, 성냥개비 얻어놓으면 안떨어 질정도로 길다. 와, 손봐. 웬만한 여자손도 저 손은 못따라가겠다. 유림을 깨우려고 침대 옆으로 다가간 윤주는 자신이 그쪽으로 다가간 사실도 잊어버리고 유림을 쳐다보는데만 열중해 있었다. 지금까지 한번도 만나본적이 없는 타입의 사람이었다. 지금까지 이십년. 길지는 않지만 나름대로는 강산이 두번 변한 시간을 살아오는 동안에 잘생겼다면 잘생긴 남자들을 수도없이 보아왔다. 항상 텔레비젼을 틀면 나오는 연예인들. 아니면 길가다 마주치는 남자들. 혹은 학교 선배나 친구. 그렇지만 한번도 남자에게는 관심이 가질 않던 윤주였다. 아무리 조각같이 잘생긴 남자라도 윤주에게는 그냥 시큰둥한 대상일 뿐이었다. 그런데 유림에게는 조금 관심이 갔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을 묘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을 유림은 가지고 있었다. 아직 그 관심이 그냥 호감인지 아니면 더 발전한 감정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윤주가 이런저런 생각을 해보며 다시 시선을 유림의 얼굴쪽으로 돌렸을때 곤히 잠들어 있던 유림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듯 하더니 윤주가 자리를 피할세도 없이 유림이 번쩍 눈을 떠버렸다. 눈을 뜨자마자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윤주의 얼굴이 나타나자 유림은 놀란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휘둥그레진 눈으로 윤주를 쳐다보았다. "뭐..뭐해요? 자는데 들어와서." "응? 수..수업하려고 들어왔지. 그래, 수업!" "그럼 깨우지 왜 사람 자는걸 쳐다보고 있어요? 이상한 취미네." 유림의 말에 윤주는 더이상 대꾸할말이 떠오르지 않는지 괜히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뻣뻣한 걸음으로 테이블에 다가가 애꿎은 교재만 폈다 접었다하며 안절부절 못하고 있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불을 켠 유림은 머리를 대충 정리하고 윤주의 맞은편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시선을 교재에만 두고 있었다. 아직도 낮의 일때문에 기분이 상해있는지 차가워 보이는 유림의 표정에 윤주는 괜시리 더 미안해 지고있었다. 잘때는 그렇게 예쁜 녀석이 ... 날개만 딱 달면 천사라고 해도 될것같은 애가 왜 눈만 뜨면 이렇게 차가워 지는걸까? 조금만 웃어도 훨씬 멋져보일텐데. 커다란 눈을 꿈뻑거리며 유림을 힐끔힐끔 훔쳐보던 윤주가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려 사탕몇개를 꺼내서 유림 앞쪽으로 내밀었다. 교재를 읽어보고 있던 유림은 윤주가 불쑥 내민 사탕몇개에 놀란듯 윤주를 쳐다보았다.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색부터가 현란한 알사탕들이었다. 대체 이걸가지고 뭘하자는거야? "이거 먹어. 내가 화해의 의미로 주는거니까. 아까 낮에는 있지 미안했어. 내가 실수한것 같아. 화 풀었지? 아직까지 화나있는거 아니지?" 어린애를 달래는것도 아니고 사탕 몇개를 내밀고는 화를 풀라고? 정말이지 정윤주 다운 발상에 유림은 어이없는 표정이 되었지만 윤주는 뭐가 좋은지 그런 유림을 향해 수줍게 씨익 미소지어 주었다. 유림은 뭐라고 하는 대답대신 윤주가 내민 세개의 사탕중 딸기 사탕을 하나 집어들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레몬 사탕을 집어들어 윤주 앞으로 내밀었다. "먹어요. 난 하나만 먹음 되니까." "그럼 화 푼거지? 응?" "........................" 유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표정만 봐도 알수 있었다. 조금은 누그러진 듯 한 표정에 윤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유림이 준 레몬사탕을 입안에 집어넣었다. 상큼한 레몬향이 기분좋게 느껴졌다. "근데 유림아 있지 ... 이건 주제넘은 참견일지도 몰라. 네 말대로 난 네 기분을 다 알수가 없잖아. 근데 있지 난 꿈은 ... 사치가 아니라고 생각해. 유림이 너도 꿈이란거 .. 미래란거 가질수 있는 거잖아. 네가 못할게 뭐있어? 며칠밖에 안봐서 모르지만 너 똑똑하고 바른애니까 못할거 하나도없잖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지말구. 난 네가 꿈을 꼭 가졌으면 좋겠다. 뭐 내말은 한귀로 듣고 한귀로 흘려도 좋지만." 그말만 던지고 윤주는 시선을 교재쪽으로 돌려 오늘 진도나갈 부분을 큰소리로 읽어주고 있었다. 하지만 유림의 귀에는 윤주의 큰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있었다. 조금전 윤주가 한 말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사치가 아니라고 ... 가질수 있는거라고 ... 꿈을 ... 가지라고. 누구도 해준적이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어쩌면 난 .. 이말을 듣기를 원했던걸까? 누군가 나에게도 미래라는게 있다고. 꿈이란걸 가질수 있고 그걸 이룰수 있을거라고 말해주기를 무의식 중에는 바라고 있었던걸까. 윤주가 해준 그말에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만약 혼자였다면 한바탕 울어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윤주 앞이었기에 유림은 눈물을 감추려 눈에 잔뜩 힘을 준채 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는 영어교재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유림이 시선을 돌려 윤주의 어깨너머로 보이는 창밖의 밤하늘에 시선을 두었다. 여름밤의 하늘. 칠흑같이 어둡다기 보다는 어슴푸레한 희미한 남색빛을 띄고 있는 밤하늘에 오늘따라 별이 많아보였다. 공기 맑은 곳이라 항상 별이 잘 보이곤 했지만 오늘은 기분탓일까. 유독히 별이 더 많아보이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부숴지는 별빛아래로 보이는 윤주의 모습에 몇년만인지 모르게 미소가 저절로 피어올랐다. 억지로 짓는 미소가 아닌 .. 마음에서 우러나서 짓는 미소. 그래, 윤주 덕택에 몇년만에 따스한 미소를 지을수 있는 밤이었다. The Silver Angel theme of love - 임형주 'Salley Garden' 작가 : 그린비 작가메일 : [email protected] 퍼가실때는 작가 메일로 연락주세요- ▶불펌 금지. 팬픽으로 성형 절대금지◀ -------------------------------------------------------------------------------- 평소와 다름없는 시간에 침대에서 일어나던 유림은 갑작스럽게 느껴지는 심장의 고통에 이를 꽉 깨물고 몸을 잔뜩 웅크렸다. 가슴이 꽉 조여오면서 아파오고 갑자기 숨쉬기가 곤란해 지는 증세. 한동안 잠잠하더니 또 찾아온 이 끔찍한 고통에 유림은 두려움이 더 크게 와닿았다. 가뿐 숨을 들이마시며 식은땀만 흘려대던 유림이 있는 힘을 다해 침대 옆쪽에 있는 핸드폰으로 손을 뻗쳤다. 실상 유림에게는 전혀 쓸모가 없는 물건이었지만 이런 갑작스런 상황이 있을걸 대비해서 가지고있는 물건이었다. 0번 버튼을 꾸욱 누르자 몇번의 신호음이 울리고 은숙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유림은 입술을 꽉 깨물고 몸을 더 잔뜩 웅크렸다. 이제는 심장을 죄여드는 고통이 조금전보다 한층 더 커져있었다. "유모 ... 의사불러 ... " 힘겹게 그 한마디만을 내뱉고 핸드폰을 아무렇게나 던져버린 유림은 더 커져만가는 고통에 이불을 꼭 끌어안았다. 아무리 입술을 깨물어 봐도 ... 버텨봐도 견디기 힘든 고통은 어찌할수가 없었다. 그렇게 일분쯤 뒤. 유모가 헐레벌떡 뛰어 올라오는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유림은 눈앞이 흐릿해짐을 느꼈다. 유림덕택에 조용하던 별장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놀란 유모가 유림의 방으로 뛰쳐 들어와 눈물을 쏟으며 난리였고 김기사는 의사를 모시러 간다며 헐레벌떡 차를 몰고 강릉 시내로 향했다. 그렇게 얼마뒤 별장에 도착한 의사는 일단 응급처치를 마치고 나서는 씁쓸한 표정으로 뒤에 선 세사람을 쳐다보았다. "심장발작입니다. 심장천식 증상으로 찾아오는건데 일단 생명에 위험을 줄만한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환자가 고통이 심할텐데 .. 그래서 일단 진통제와 수면제를 같이 주사했으니 오후쯤 지나야 깨어날겁니다. 약은 꼭 먹이셔야 합니다. 한달에 두번씩은 검진하러 오셔야하구요." 의사는 한무더기의 약봉지와 링겔병 몇개를 남겨두고는 다시 진료 가방을 챙겨서 별장을 떠났다. 이렇게 의사가 온다해도 해줄수 있는 치료는 고작 이런것이 전부였다. 그를 배웅하고 들어오는 은숙의 눈가에는 눈물방울이 맺혀있었다. 이런 심장발작은 자주 일으키는 유림이었고 이제는 익숙해 질만도 하지만 그래도 눈물이 났다. 저 어린 나이에 ... 마음껏 뛸수도 없는. 학교조차 포기하고 이런 산속에서 안정을 취해야하는 유림. 그리고 몸서리 쳐질만큼의 약들. 그 모든게 보는이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갑작스런 상황에 윤주 역시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었다. "유림이가 ... 많이 안좋은가요?" ".....선천성 심장병이세요. 거기다가 심장천식까지 합병증으로 오시는 바람에 .... " "수술 하면 낮는다던데 ..." 수술이면 뭐든지 다될거라는듯한 윤주의 말투에 은숙은 쓴 웃음을 지었다. 벌써 세차례나 심장 수술을 받은 유림이었다. 가슴을 세번이나 가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