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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 - 상편
최고관리자 0 45,512 2022.12.02 01:36
1 “막차 끊겼어요!” 매표구 안으로 입만 보이는 매표원이 짧고 건조하게 대답했다. 평생 웃어본 일이 없을 것 같은 입매였다. “그럴 리가요. 열 한 시 반이 막차 아닌가요?” “저 기둥에 보세요.” 매표원이 다시 한 번 짜증스럽게 답했다. 기둥을 보니 ‘동절기 서울-무곡 간 버스노선 단축운행 안내’라고 쓰여 있었다. 막차는 아홉 시 반이었다. 대학에 입학 해 졸업을 하고 기자 일을 하는 동안은 쭉 서울에서 살았으나, 기자도 그만 두고 작가 지망생으로서의 삶을 살면서 고향 무곡으로 내려온 것이 7월의 이야기. 지금은 눈이 날리기 시작한 11월이다. 이번에 서울에 온 것은 그저 대학 동창회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술자리는 어지러웠다. 이야기보따리에서 우리의 추억은 마치 당의정에 살짝 발라진 설탕 같았다. 짧은 추억 이야기가 끝나자 친구들은 서로 약속이나 하듯 연봉을 묻고, 재산을 묻고, 직장을 물었다. 쓰디 쓴 현실 이야기였다. 그러다 한 친구가 욕을 했고, 다른 친구는 술병으로 그 친구의 머리통을 내리치는 것으로 화답했다. 내가 지방에서 오로지 동창회를 위해 올라왔음을 아는 한 친구가 자기 집에서 자고 가라고 붙잡았으나 별로 그러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다. “씹할…… 저 새끼는 예나 지금이나 저렇게 술자리에서 도망만 가냐.” 조용히 술을 마시던 한 친구 놈이 중얼거렸다. 그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현실에서 도망쳤다. 그렇다고 해서 이상을 찾은 것도 아니었다. 그저 현실이 아닌 어정쩡한 시공간을 살 뿐이었고, 결국 서른을 넘어서도 작가 지망생이나 하고 있는 처지였다. ‘씹할.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도망만 다녀야 하나.’ 기둥 앞에 서서 이렇게 쓴 입맛을 다시며 당장 오늘밤 어디에서 자야 할지를 고민했다. 재워주겠노라 했던 친구의 집에 가려면 택시를 타고 한 시간은 달려야 할 터인데, 술값을 내고 수중에 남은 돈은 삼 만원이 전부였다. 친구네 집에 빈손으로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니, 택시비와 소주 한 병이라도 살 돈을 빼면 오히려 집에 내려갈 차비가 없었다. ‘찜질방이라도 가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겠지. 부르긴 누가 불러.’ 그러나 아니었다. 다시 한 번 누군가가 나를 똑똑히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성환아! 너 성환이 맞지?” 그제야 나는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여자가 한 명 서 있었다. 옅은 컬의 긴 파마머리에는 윤기가 흘렀고, 날씬하고 탄탄한 몸을 타이트한 레인코트가 감싸고 있었다. 레인코트 아래로는 통이 넓은 청바지가 곧게 내려오고 있었다. 그러나 얼굴을 목도리로 반쯤은 가리고 있어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고, 나이를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신문사에서 보던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누구……” 여자는 내게 다가오며 목도리를 풀었다. 목도리가 풀리며 환하게 웃는 표정이 나타났다. 2 “야! 네가 여자냐?” 명현이 녀석은 닷 발은 나온 입으로 한 마디 쏘아붙이더니 평소 가지고 다니는 장난감 칼로 벽을 쾅쾅 치며 집으로 돌아갔다. “너랑 이제 안 놀아!” 녀석이 삐치기는 단단히 삐친 모양이었다. 명현이 녀석의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는 타지에서 시집을 왔고, 거의 똑같은 시기에 아들을 낳았다는 공통점을 가져서인지 유독 함께 어울리는 일이 많았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들은 목욕탕도 함께 갔는데, 문제는 우리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터졌다. 어릴 땐 어머니들을 따라 우리도 함께 목욕탕에 가서 놀곤 했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명현이 어머니는 명현이의 목욕을 아버지에게 맡긴 것이었다. 반면 우리 어머니는 무뚝뚝한 남편 탓인지 아니면 내가 또래에 비해 어려 보인 탓인지 초등학교 2학년까지는 나를 목욕탕에 데리고 다니셨다. 명현이 녀석의 불만은 그것이었다. 당시에는 그저 나와 같이 놀지 못해서라고 생각 했지만, 돌아보면 이미 자신에게는 금지된 곳에 친구만 홀로 자유롭게 드나든다는 질투, 더 나아가 비밀스러운 것을 더는 볼 수 없다는 절망감이 아니었나 싶다. 안타깝게도 목욕탕 안에서의 명현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단 한 장면만 남아 있다. 목욕 의자에 앉아 다리를 벌리고 보지를 닦을 때, 나는 그 신비한 곳을 넋을 놓고 쳐다보았다. 작고 흰 손이 검은 수풀을 덮었다가 다시 놓아주는 장면을. 그 때 명현이 어머니는 나를 보고 씩 웃어 주었다. 아직도 그 미소는 모나리자의 미소보다 더 신비롭고 유혹적인 장면으로 내 뇌리에 깊이 박혀 있다. 명현이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다시 중학교 때로 이어진다. 초등학교 4학년 쯤 반이 아주 갈리며 명현이 녀석과도 차츰 멀어졌다. 일부러 놀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서로 속하는 동아리가 달라지니 굳이 어울릴 기회가 없었달까. 당시 장동건, 손지창, 심은하 주연의 ‘마지막 승부’라는 드라마가 공전의 히트를 치며 농구 열풍이 불었고, 명현이 녀석도 농구를 하는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 때 나는 때 이르게 연애라도 한 번 해볼까 하는 심산으로 학원에 다니며 좀 노는 아이들과 잠시 어울릴 때였다. “야! 너 오늘 바쁘냐?” 체육시간 후 수돗가에서 세수를 하는데 명현이 녀석이 물었다. 실로 오랜만이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명현이 녀석에게 장난으로 물을 조금 뿌리며 말했다. “없어 새끼야!” “후회 할 텐데?” “뭔데?” “죽이는 비디오. 우리 집에서 보자.” “나 말고 또 누구 오냐?” “오긴 누가 와. 간만에 비디오나 보고 나중에 게임이나 하던지.” 이미 초등학교 때 포르노는 여러 번 본 데다, 나는 이미 그저 화면 속에서 보는 여자가 아닌, 하다못해 손이라도 직접 잡아볼 수 있는 진짜 여자에 관심이 가던 터였지만 어쩐지 명현이 녀석의 제안은 거절하고 싶지 않았다. 목욕탕에서 보았던 명현이 어머니의 그 조선백자 같은 피부와 먹을 갈아놓은 것처럼 새카만 숲, 그리고 수줍었던 미소만은 또렷하게 떠올랐고,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나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유혹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명현이 어머니를 볼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나를 그 곳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명현이 녀석의 집에 도착 했을 때 나는 적잖이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명현이 부모님은 물론 아들네 집에 다니러 오신 할머니까지 계셨기 때문이었다. “야, 볼 수 있겠냐? 나 그냥 갈까?” “잠깐 기다려. 부모님이 할머니 배웅하러 나가시면 한참 걸리니까.” 아닌 게 아니라 할머니는 바리바리 짐을 싸고 계셨고, 짐 싸는 일을 돕던 명현이 아버지는 내 의중을 헤아리셨는지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놀다 가거라. 우린 곧 나갈 거야.”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거실 구석에서 배웅 준비를 하는 모습을 구경하다가 무심결에 방 하나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명현이 어머니가 옷을 갈아입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목욕탕의 흐릿한 기억과는 달리, 비로소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온 그 장면. 명현이 어머니는 집에서 입는 회색 원피스를 벗고 있었다. 발목부터 드러나는 나신에 나는 홀리듯 방문에 붙어 그 광경을 보았다. 원피스는 조금씩 아주머니의 몸을 보여주었다. 희고 매끄러운 다리 그 위의 종아리 연분홍색 팬티 바이올린 같은 곡선의 허리 그 위로 알맞게 솟아오른 가슴까지. 브래지어는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 광경을 그저 쳐다만 보고 있었다. 걸리면 어떡하나 하는 마음은 이미 잊은 지 오래였다. 오히려 그 광경을 놓치면 평생 후회 할 것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 그 때 거실에서 명현이 녀석이 소리쳤다. “야! 주스 마실래?” “어…… 어……” 그제야 내 목소리가 방문 어귀에서 나는 것을 알아차린 명현이 어머니가 브래지어를 하다 말고 놀란 듯 내 쪽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정신을 차렸던 것일까? 비로소 방문 어귀에 서서 친구 어머니가 옷 갈아입는 모습을 훔쳐보던 나 자신을 인식해 버린 것이었다. 명현이 녀석이 알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우리 부모님께 말씀이라도 하시면 나는 얼마나 혼나게 될까. 그런 고민을 하며 나는 겁에 질려 명현이 어머니의 눈빛을 받았다. 그러나 그 때도 명현이 어머니는 목욕탕에서 보여주었던 그 웃음을 지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마저 옷을 입었다. 내가 평생 본 어떤 포르노보다 선정적이고 생생했던 장면이었다. 그 후 그 날 내가 어떤 포르노를 보았는지, 어떻게 집으로 돌아갔는지에 대한 기억은 없다. 다만 그 날 나는 처음으로 몽정을 했고, 파란 팬티에 묻어난 정체 모를 흰 액체에 당황하며 부모님 몰래 동네 슈퍼 앞 쓰레기통에 팬티를 버렸던 기억이 있다. 3 “맛없어?” “네?” “넋을 놓고 있기에. 그나저나 막차는 언제부터 그렇게 앞당겨졌다니?” “그러게요.” 내 멍한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명현이 어머니는 그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식사를 시작했다. 터미널에서 마치 사고처럼 우연히 마주친 명현이 어머니. 나는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놀라 있다가 식사라도 하자는 말에 터미널 앞 식당에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가만히 명현이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터미널에서는 경황이 없었기에 비로소 십여 년 만에 이렇게 자세히 보게 된 것이다. 명현이 어머니 역시 세월을 피해가지는 못했다. 세련된 헤어스타일이나 옷차림과는 달리 피부는 많이 상해 화장은 살짝 들떠 있었고, 눈가에는 잔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나는 비로소 십여 년의 세월이 걸었던 알 수 없는 발자국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더 이상 백자 같은 피부의 모나리자는 없다.’ 그렇게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명현이 어머니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세월이 짓밟은 가운데에도 아름다움은 군데군데 남아 내 눈길을 잡고 있었다. 내 눈길을 의식했는지 명현이 어머니가 수줍게 웃었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의 어깨에 조금씩 흰 눈이 더해졌다. “눈이…… 오나 봐요.” “어머! 넌 어디에서 잘 거니?” “모르겠어요. 찜질방이라도 가야 하나 그러고 있었어요. 그러나 식당을 나오며 밥값을 치른 사람은 나였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 어머니 앞에서 궁핍한 모습은 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이제 수중에는 돈 만원뿐이었다. 터미널에서 웅크리고 있다가 첫 차를 타는 수밖에 없었다. 식당 앞에서 나는 명현이 어머니를 향해 작별인사라도 할 요량으로 잠시 멈추었으나 명현이 어머니는 내 손을 잡고 길가로 향했다. “택시!” 택시에 오르면서도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저기……” “잠자코 있어.” 명현이 어머니가 내게 윙크를 하며 말했다. “나 아까 네 지갑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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